
예술가는 종종 자기 작품을 “내 자식”이라고 부른다.
그저 비유에 그치는 표현이 아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듯, 작품 안에는 애틋함을 넘어 창작자 자신의 DNA가 녹아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공정을 거친 산출물이 아니라, 살을 떼어내는 자기 복제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작가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한다.
“이 작품은 곧 나예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일은 늘 고통이다. 창작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되지도 않는 욕심을 버리고 무로 돌리는 과정에 가깝다. 그러나 오랜 다짐에도 하얀 종이 앞에 서면 꿈틀거리는 야망을 외면하기란 힘들다. 뭔가를 써야 한다는 압박, 새로워야만 한다는 강박. 정체 모를 불쾌한 구역질이 입덧처럼 찾아오고, 그 앞에서 쉽게 무너진다.
최혜진 에디터는 『에디토리얼 씽킹』에서 “진짜 훔치기를 경계하라”고 말한다. 작업에 앞서 레퍼런스 수집 단계가 있다. 한편, 이 과정에서 좋은 레퍼런스를 모아만 놓고 흐뭇해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소재와 아이디어를 얻더라도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창작이 아닌 표절이 된다.
["레퍼런스 덕분에 작업이 술술 풀린다면 당신의 훔치기가 진짜 훔치기가 되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한바닥 쌓아놓은 레퍼런스에서 끙끙거리고 있다면 오히려 좋은 신호다. 고통 끝에 창조가 있으리라."] - 『에디토리얼 씽킹』 中
입덧이 사라질 때, 임산부는 불안을 느낀다. 유산의 전조가 아닐까 두려워서다. 창작도 마찬가지다. 괴로움 없는 작업은 오히려 작품이 생명력을 잃어간다는 신호일 수 있다. 작업이 지나치게 수월하게 진척된다면, 질문해야 한다.
나는 지금 충분히 아픈가?
마감 앞에서 초라해지는 내가 싫다. 그럼에도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은 것을,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을 세상에 내놓아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것은 창작의 고통 그 이상이다.
가끔은 적당히에서 멈추지 못하는 자신이 싫다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못 쓰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지만, 훔치는 사람이 되기는 더더욱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