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연극 <워크맨>은 2060년의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한다. 연극을 보고 있으면 35년밖에 안 지났는데 너무 바뀌었다는 생각과, 35년이나 지났는데 현재와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그만큼 2060년은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 미래다.


연극의 제목, ‘워크맨’은 극 중 등장하는 앱의 이름이다. 기술이 발달하여 근무 시간이 매우 짧아진 세상, 사람들은 행복하기만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울증 등 정신 질환이 심각하고 자살률도 매우 높다. 극 중에서도 투신자살 장면이 빛과 소리를 활용해 몇 차례 등장한다. 워크맨은 이런 현대인들이 걷고(walk) 일하게(work) 만들어 정신 관리를 도와주며, 이 워크맨 서비스를 이용하는 여러 인물이 이 극의 등장인물이다.


그리고 등장’로봇’이 하나 있다. 기술이 발달해 일대일 안드로이드 로봇 ‘알마’가 상용화된 시대다. 알마는 극의 여기저기에 등장하며 사람들 대신 일한다. 처음에는 이 알마가 불필요한 캐릭터처럼 보였다. 미래 사회라는 걸 표현하거나 드문드문 웃긴 장면을 만드는 것 외에는 하는 역할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알마가 캐릭터가 맞긴 한 건지조차 의문이 들 때쯤, 알마에게 오류가 발생한다. 감정적으로 행동할 수 없는 로봇에게 ‘감정 로그’가 축적되어 오류가 발생한 것.


연극의 부제는 ‘걷지 않고 일하지 않아 발생한 비극에 대하여’이다. 사람들이 걷지 않고 일하지 않아 아픈 것이라면, 사람들 대신 걷기도 하고 일도 하는 알마는 건강해야 할 텐데 알마도 아프다. 그렇다면 이 비극이 정말 걷지 않고 일하지 않아 발생한 비극인 걸까. 알마는 걷고 일하는데도 왜 아프고, 워크맨을 통해 부러 걷고 일하는 사람들은 왜 좀처럼 낫질 못하는 걸까.

 

 

포스터_워크맨_web.jpg

 

 

화창하다가도 폭우가 쏟아지고, 먹구름이 드리웠다가도 해가 뜬다. 기후 위기가 심각해진 2060년의 하늘이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다. 기후 위기가 닥친 날씨만큼 변덕스러운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워크맨 운동의 개발자인 ‘김민준’의 아내 역시 우울증을 앓았다. 그러다가 완쾌한 듯이 보여 민준이 방심했을 때 아내는 목숨을 잃었다. 먹구름이 드리웠다가도 해가 뜨고, 화창하다가도 폭우가 쏟아진다.


소품이 많지 않은 무대인데도 변덕스러운 날씨와 정서의 변화가 매번 극명하게 드러난다. 조명을 통해 가장 직관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조명 기사의 손가락 끝을 따라 비가 내리고 멎고, 사람이 살고 죽는다. 그렇게나 쉬운 일이다.


등장인물 가운데 폭우를 직격으로 맞는 인물은 민준의 딸이자 중증 우울증을 앓는 ‘김 시트왓 설린’이다. 설린의 감정은 극과 극을 오가다가 결국엔 물살에 휩쓸린다. 변덕스러운 날씨를 인간이 이길 수 없듯 변덕스러운 감정을 내가 이길 수는 없다.

 

 

alexander-jawfox-rrFNEDMaCUE-unsplash1.jpg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나을 수 있는지, 극에서 해답을 찾지는 못했다. 사실 워크맨이라는 서비스의 매력이나 신선함을 느끼지 못했다. 이 서비스의 역할을 작품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잘 알기 어렵다. 하지만 그 이유를 고민해 보려고는 했다. 우리는 왜 걸어야 하고 왜 일해야 할까? 두 가지 모두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행동이다. 한 발짝 한 발짝. 알마도, 워크맨 유저들도 걷고 일하고는 있지만, 명령을 따를 뿐이다. 이로써 내가 어디를 향하는지, 이다음의 내 앞날이 어떻게 되는지는 알지 못한 채 움직인다. 그렇다면 <워크맨>이 그리는 비극은 걷지 않고 일하지 않아서라기보다도, 앞날을 그리지 않아 발생한 비극이겠다.


왜인지 거창한 것이 좋아 보여 자꾸 훗날을 내다보며 원대한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체를 한눈에 보기도 어려운 거대한 청사진보다도, 오늘의 약속, 내일의 식사 메뉴다. 작품의 배경이 머나먼 미래가 아니라 40년도 채 지나지 않아 펼쳐지는 코앞의 근미래라는 점도 내용이 더 와닿게 하는 요소 중 하나다. 당장의 앞날을 그려주고 있으니까.


설린은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숨을 들이쉰다. 해가 떠서는 아니다. 화창한 날이 다시 찾아오리라는 보장은 절대 없다. 하지만 그대로 숨을 거두면 설린의 해는 영원히 뜨지 않으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극중 인물로는 103세의 나이로 매일 똑같은 하루에 지쳐 안락사를 기다리던 ‘최미연’이 있었고, 그도 설린의 투신 현장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하지만 숨을 다시 쉬기 시작한 설린도 보았다. 미연은 끝까지 안락사를 선택할까? 아니면 다른 선택을 할까.

 

 

 

image.png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