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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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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기쁨과 슬픔의 연속이다. 오롯이 기쁜 삶도, 날마다 슬픈 삶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어쩐지 기쁨의 날들보다 슬픔의 날들이 더 많다고 느끼는데, 그것은 절대적 횟수의 차이가 아니라(실제로는 기쁜 일과 슬픈 일의 횟수가 정확히 동일하거나, 혹은 기쁜 일이 더 잦을 수도 있으므로), 감각적 깊이의 차이다. 동일한 크기라면 우리 마음은 기쁨보다는 슬픔을 향해 더 자주, 더 깊게 열린다.


이것은 불편한 진리다. 슬픔을 외면하는 것은 우리의 본능에 가깝지만, 삶의 진실을 온전히 마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슬픔으로 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삶에 대해 말하고 싶다면 기쁨을 만끽하되 슬픔 또한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는 것. 슬픔의 불편함 앞에서 우리는 손쉽게 삶의 진실 반쪽을 포기하고 만다. 다만 다행인 사실은 우리가 슬픔을 포기한 순간에도 삶은, 그리고 시는 쓰이고 있다는 것. 분명 존재하지만 어떻게든 외면하고 싶은 슬픔의 그 깊은 구덩이 안을 기꺼이 들여다본 시인이 있다.


최승자의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문학과지성사, 2016)을 읽는다.

 

 

슬픔을 치렁치렁 달고

내가 운들 무엇이며

내가 안 운들 무엇이냐

해 가고 달 가고

뜨락 앞마당엔

늙으신 처녀처럼

웃고 있는 코스모스들


- <슬픔을 치렁치렁 달고> 전문

 

 

슬픔이 찾아오면 우리는 운다. 서럽게 터져 나오는 큰 울음이든, 비집고 새어나오는 흐느낌이든, 우리는 울음이 지금의 슬픔을 지워주리라 믿는 것처럼, 운다. 그렇다면 울음은 슬픔의 특효약일까. 최승자는 일단 단호하게 부정한다. 짊어진 슬픔이 너무 크고 깊어서 “슬픔을 치렁치렁 달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울음조차 소용이 없다고. 그런 이들에게 삶은 “내가 운들 무엇이며 / 내가 안 운들 무엇이냐”고. 우리의 울음과 상관없이 해와 달은 뜨고 지며, 세상은 돌아간다. 세상이 제 속도로 움직이는 한 세상에 태어난 우리의 슬픔도 같은 속도로 우리를 따라온다. 슬픔의 항상성은 구체적이다.


세상에 만연한 근원적 슬픔은 울음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벗어날 수 없는 슬픔을 품은 채 “마지막 저녁을 먹고 있을” 그 “어느 날”을 기다리며 죽어가는 일뿐일까.(<어느 날 나는>) 만약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할 지식을 쌓고 불합리를 무너뜨릴 지혜를 다진다면,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을 점차 수정해 미래의 저편까지 살아남는다면, 슬픔의 끈질긴 굴레를 극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허공 가득 이 이름들 저 이름들

자본주의 수정 자본주의 민주주의 공산주의 복지국가

이 카스트 제도 저 카스트 제도

쉬임없이 날아 다니는 온갖 부운몽들

그 허공 위로 아직도 올 카스트 제도들


- < 미래의 어느 뒤편에선가> 중에서

 

 

최승자의 진단은 이렇다. 지금까지 인류가 행했던 모든 시도는, 일단은 실패라는 것. “자본주의 수정 자본주의 민주주의 공산주의 복지국가” 따위의, 인간이 만든 모든 이념들은 어차피 계급 위에 계급을 쌓아 슬픔을 축적한 “카스트 제도”의 반복일 뿐이라는 것. 우리가 만든 모든 지식의 집합체들은 허공에 뜬 구름 같은 몽상이며, 노자나 장자의 책처럼 시간이 지나면 낡아 “리어카 위에 헐값으로 팔려”갈 허탈한 지혜고, “슬픈 자들은 슬픈 자들끼리”(<그것이 인류이다>) 벌이는 그들만의 잔치이다.


울음(감성)으로도 지식(이성)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것이 세계의 슬픔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곳은 부정할 수 없는 슬픔의 세계다. 여기까지라면 이 세계에 머무는 누구나 알아챌 수 있는 사실일 텐데, 시인은 그 슬픔의 세계―나의 존재를 향해 한걸음 더 깊게 나아간다. 그러니까 시인 최승자는 바깥에서 슬픔의 구멍 안을 들여다본 게 아니라, 자신의 쓸쓸한 몸으로 구멍에 직접 들어가 바깥을 올려다본 것.

 

 

내 존재의 빈 감방

푸른 하늘이 떠 있지 않나요

갇혀진 감방이 아니에요

바람으로 구름으로 통하는 감방이에요

그런데도 감방은 감방이로군요


- <내 존재의 빈 감방> 중에서

 

 

슬픔의 세계 가장 깊숙이에서 올려다보면 여전히 “푸른 하늘이 떠” 있다. 슬픔의 세계는 “바람으로 구름으로 통하는”, 그러니까 생존 가능성이 농후한 곳이다. 물론 벗어날 수 없는 “감방은 감방”이라는 사실은 변함없기에 막연한 희망의 공간은 아닐 테다. 다만 최승자는 이 세계가 슬픔으로만 숨 막히게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숨 쉴 수 있는 공간으로서 얼마간은 비어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 비어있음을 통해서 “당분간 사람들은 각자 각자 잘 살아 있을 것”이고, 우리의 생애도 “당분간 편안하게 흔들리고 있을 것”(<당분간>)이다.


우리는 슬픈 존재로 살아간다. 이것은 씁쓸한 하나의 진실이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슬프다는 사실이 아니라, 적어도 당분간은,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이상이 슬픔의 구덩이에서 보내온 최승자의 탐사 보고서다. 우리가 애써서 잃어버린 삶의 반쪽을 굳이 되찾는 탐사적 수고는 시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진실이 때로는 우리를 살린다는 것을 시인은 안다. 아니, 우리 모두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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