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오는 2017년 앨범 <23>의 'TOMBOY'로 대중적으로 알려진 밴드입니다. 무한도전을 즐겨본 이라면, 곡을 듣지 않았더라도 밴드의 이름과 'TOMBOY'는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이름과 유명한 하나의 곡으로만 소개하기에는 앨범 사이에 들어있는 달큰한 사랑과 철학이 몹시 아깝습니다. 시 한 편을 읽은 것만큼 마음을 안온한 불씨로 데워주는 가사는 복잡했던 밤을 잘 보내줄 수 있는 수면제가 되어줍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창틈 사이로 들어오는 잔잔한 바람과 함께 혁오의 '공드리'를 듣고 있는 필자는 노래 하나로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것일까?' 생각합니다. '햇살이 우릴 덮으면 녹아버릴 거야' 따뜻한 햇빛처럼 우리를 녹일 혁오의 철학을 혁오의 'Y'를 통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We all die therefore new thing, 우리는 죽기 때문에 늘 새로워
We all die therefore new thing
That you said moment was short
We're all here for seeing new scene
Then you said that I am free
I'm missing truth
I'm missing truth
The moon light shine
The moon light
We all live therefore new sin
And you said waiting is long
We're all here to see new dawn
Yet we face insanity
Oh why
What's the answer where to find?
Why Why I had to choose one side?
Why wrinkle is my scars of time
Why thought it's fine we learn or die
- 혁오
가사
2024년에 발매된 혁오의 < AAA >
['We all die therefore new thing. 우리는 죽기 때문에 늘 새로워.']
혁오는 'Y'에서 첫 마디로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는 죽기 때문에 늘 새롭다고. 죽음은 역사상 가장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중세 시대, 서양에서 죽음의 개념이 생겨남에 따라 사람들은 죽고 난 이후 지옥으로 가지 않기 위해서 신께 기도했습니다. 근대에는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게 헛되다고 생각하며 예술 작품에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을 그려 넣기도 했죠.
잠깐 설명해 드리자면, 이를 '바니타스 Vanitas'라고 합니다. 삶은 공허하고 죽음 앞에서 물질적인 것 혹은 세속적인 것은 모두 헛되다는 것을 정물화로 표현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은 1630년에 그려진 네덜란드 화가 페터르 클라스의 '바니타스 정물화 Vanitas Still Life'입니다.
새로운 대륙을 찾아 나섰던 시대상을 보여주는 나침반, 사랑하는 이에게 받은 쪽지, 아직 메마르지 않은 붉은 꽃은 언젠가 꺼질 촛불처럼 죽음 앞에선 헛됩니다. 그러나 혁오는 죽음에 관하여 우리는 죽기 때문에, 그렇기에 늘 새롭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가사에 <사랑으로>의 'Flat dog' 가사를 덧붙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린 늘 움직이니 비로소 가만히']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릅니다. 바뀐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해도 우리는 어제와 다릅니다. 어쩌면 인간의 본질이 '변화'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움직인다'는 본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혁오가 말했듯이, 우린 늘 움직이기에 비로소 가만히 존재합니다.
필자는 이러한 본질에 안도하며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잠을 청했던 적이 있습니다. 인생을 하루 단위로 생각하면 오늘의 인생을 다 살면 우리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어제의 나는 이미 죽은 존재이죠. 내일의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면, 다시 태어납니다. 고로 우리는 매일 새로 태어나는 존재입니다.
['We're all here for seeing new scene. Then you said that I am free 우리는 새로운 장면을 보기 위해 여기에 왔어. 그랬더니 너는 내가 자유롭다고 말했지.']
우리는 매일 죽고, 매일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장면으로 어제와 다른 하루를 하나씩 쌓아 올릴 우리는, 늘 새롭습니다.
Yet we face insanity, 그러나 우리는 광기를 마주하지
1절이 끝나고, 혁오는 'I'm missing my truth 나는 진리를 잃어버렸어'., 'We face insantiny 우리는 광기를 마주하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듯, 'what's the answer where to find? 답은 무엇이고,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거지?', 'why wrinke is my scar of time 왜 주름은 시간의 흉터인 거야?'라고 듣는 이에게 묻습니다.
자유롭고 정형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항상 길을 잃습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인간의 육체는 시간이 지나간 흔적인 '주름'이라는 형태로 늙어갑니다. 하지만 미완성이고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소중한 것 아닐까요?
2001년에 작성된 논문, <20세기 말 공 사상으로 표현된 젠 스타일>의 저자 임지영은 오늘날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현대인은 현상과 본질을 절대적으로 구분하는 서구의 이원론적 사상으로 발전해온 현대 과학 문명의 종말적 위기 앞에서 점차 자신의 존재를 잃어감에 따라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 방황하게 되었다'고.
그러나 불교 사상으로 우리 인간의 삶을 바라보면, 인간은 이것과 저것으로 나눌 수 없는 단 하나의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그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은 '중도'이죠. 불교 사상에서 중도란, 현상과 본질과 같이 양극단을 분리하지 않고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을 말합니다.
혁오는 이러한 중도 사상에서 수면 위로 떠오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 같습니다. 진리란 없고, 의미도 없는 허상으로 가득찬 이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좇아야 하나 고민하며 말입니다.
이처럼 불안한 하루를 보내고 잠 못 드는 당신에게, 완벽하지 않아서 다행이라 말해주고 싶습니다. 우리는 줄곧 미완성보다 완성이 고차원적이라 생각하고, 완벽을 향해 발버둥 쳤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선 미완성은 완성을 초월한 영역입니다.
불안하기에, 불안정하기에 잘하고 있다고 다독이며 이만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혁오의 'Y'를 들으며 어제와 과거의 아픔을 잘 묻어주고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중도'의 마음으로 오늘과 내일에 새로 태어날 나를 잘 맞이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