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을 매주 기고하면서 되도록이면 다양한 분야의 섹션에 글을 올리고 싶었다. 이번 주에는 ‘사람’ 카테고리에 올릴 글을 쓰려다 보니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사람에 대한 상념에 사로잡혔다.
일단 ‘사람 일반’에 대한 것인지 어떤 ‘한 사람’에 대한 글을 쓸 것인지를 정해야 했다.
나는 많은 시간 동안 ‘사람’은 어떤 존재인지, 우리가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본질적 특성 같은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했지만 내가 생각해낸 인간 본질이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한 개인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내가 인간이 ‘영웅적’ 면모가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언젠가 내가 끈질긴 정신으로 버텨낸 한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고, 만약 인간이 궁극적으로 선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것은 내 코에 휴지를 꽂아준 사람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이러한 기억은 삶의 경악 앞에서 금이 간 마음을 다시 붙여내기 위한, 방울방울 새어 나오는 끈끈한 접착제처럼 존재한다.
‘선한 행동’에 대한 아마도 최초의 기억
나는 어렸을 적 특정 시기(초등학교 입학 때)에 코피를 자주 흘렸다. 의사도 원인을 몰랐기에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몸이 마르고 잔병치레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모둠 활동을 하는 시간에도 코피는 눈치 없이 흘러나왔는데 그걸 본 선생님은 내 코에 작은 휴지를 끼워 넣어 코를 막아버렸다. 그 작은 휴지 조각은 곧 재채기 한 번으로 내 작은 콧속에서 해방되었는데, 동시에 알록달록한 색상의 책상들을 가지런하게 모아 만든 우리의 멋진 모둠 책상에는 빨간 피가 흩뿌려졌다.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고 어떤 애는 무섭다고 했다. 놀란 사람들 앞에서 무얼 어떻게 해보겠다는 의지를 잃은 채 가만히 서 있던 나에게 피 묻은 휴지 조각을 집어 들고 다가오는 아이가 있었다! (이 장면은 굉장히 느린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아이는 나에게 다가와 그 휴지 조각을 다시 내 코에 끼워 넣었다. 그때 나는 피가 묻은 그 손을 보았다. 피가 묻은 손. 그 피 묻은 손에 대한 기억은 여러 번 기억하는 과정을 거쳐서 일종의 접착제가 되었다. 마음의 작은 금을 위해 방울방울 새어 나오는 접착제.
나는 접착제가 필요할 때마다 문득 궁금해진다. 그 선한 의지는 어디로부터 나온 것일까?
회복하는 인간
나는 피를 묻혀가며 코에 휴지를 꽂아 주는 사람과 사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얼굴을 흉터투성이로 만드는 사람과도 살고 있다.
나는 과거에 학교 강연에 초청을 받아 찾아온 얼굴의 부분들이 덩어리지듯 울퉁불퉁한 강연자를 보았다. 누군가 술을 마시고 차를 몰았고 그 사고가 그녀의 얼굴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녀가 선 강연은 항상 종교적 교훈으로 마무리했기 때문에 강연을 보면서 도대체 이런 고통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할 것인지 나로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일은 불행했지만 저는 많은 깨달음을 얻었기에 더 이상 불행이 아닙니다’라는 식의 말을 할까봐 겁이 났다.
하지만 강연자는 불행은 본질적으로 좋은 것이 없지만 우리는 인생에서 다른 좋은 것들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달했다. 진짜로 그녀는 정말 많은 것들을 해냈다. 초점은 불행이 아니라 불행에서 회복하는 인간이다.
강연자는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그때 나는 불행을 견뎌낼 수 있도록 한 ‘종교의 힘’보다는 받아들일 수 없이 놀랍고 어색한 자신의 망가진 외형에 익숙해져 갈 수 있도록, 마음은 망가지지 않을 수 있도록, 그래서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인간을 만든 신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인간에게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을 수 있는 믿음도 있다.
나는 이따금 날카롭던 괴로움들이 여러 번 문질러진 돌의 표면처럼 매끄러워진 것을 보며 놀랄 때가 있었다. 너무 평평해져서 이제 그 표면에서는 아무런 통증도 느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