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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그 여름날 밤 가로등 그 불빛아래

잊을 수도 없는 춤을 춰

귓가를 울리는 너의 목소리에

믿을 수도 없는 꿈을 꿔


이제는 늦은 밤 방 한구석에서

헤드폰을 쓰고 춤을 춰

귓가를 울리는 슬픈 음악 속에

난 울 수도 없는 춤을 춰

 

 

‘혹시 춤을 좋아하세요?’라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아마 난 열이면 열 ‘아니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멋지게 춤을 추는 댄서들을 보며 매력을 느끼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독한 몸치라 실제로 춤을 추는 것은 싫어한 탓이다.

 

그러나 춤만큼 음악과 잘 어울리는 것이 또 없다는 사실에는 백번 동의할 수 있다. 춤과 거리가 먼 나라지만 음악을 들으며 신난 마음을 어색한 몸짓으로 표현하곤 했으니까. 춤은 언제나 음악과 함께 해왔다.

 

춤과 음악 간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때문인지, 노래를 듣다 보면 ‘춤춘다’는 가사가 의외로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춤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춤’이라는 단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한 가수의 말 때문이었다.


“춤을 추면 자의식이 사라지고 머릿속이 맑아졌다. 땀을 흘리고 근육통에 시달리며 무심하게 춤을 추면 이제껏 죽어 있던 내가 되살아난 듯 힘이 솟았다. 그날 이후로 춤은 나의 소중한 일부가 되었고, 심지어 사랑하게 되었으며 ‘춤추다’와 ‘살아있다’는 말이 내 안에서 같은 의미로 자리 잡았다.”¹


이 말에 왜 그리 감명을 받았던 것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이 이야기를 접한 이후로 나에게도 춤은 커다란 에너지를 상징하는 말로 자리 잡았다. ‘춤춘다’는 가사에 집중하게 되었고, ‘춤’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힘든 날이면 그런 가사가 들어간 노래를 찾아 들으며 힘을 받기도 했다.


 


 

숨을 죽여 말해

들키지 않게

그 아무도 모르게 춤을 출 거야

다시 또 무너질 걸 알지만


불이 꺼진 채로 밤을 불태울까

우리에게 어떤 것도 닿지 못하게

눈을 감은 채로 마주 보며 있자

내일 속의 어떤 것도 알지 못하게

 

 

그러다 춤에 대해 다시 상기하게 된 것은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보게 된 한편의 영화 때문이었다.

 

나데르 사에이바르의 <증인>은 남편이 그의 아내를 죽이는 것을 목격하고 이를 증언하는 한 여성의 모습을 그린 영화이다. 이란 사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이 영화에는 춤이 중요한 키워드로 등장한다. 남편은 아내가 춤을 추는 것을 못마땅해했고 그 일을 그만두길 바랐다.

 

그러나 아내는 계속해서 춤을 추었고, 춤을 가르쳤다. 그의 딸은 엄마와 같이 춤을 추며 굳건해 보이는 집을 나선다. 엔딩 크레딧에서는 춤을 추는 실제 이란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유를 원하던 여성들의 춤을 보고 난 후, 더 이상 춤은 단순히 밝고 즐거운 에너지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춤은 저항이 될 수 있었다.

 

어느덧 3월도 끝자락에 다다르고, 추위와 더위를 오가는 변덕스러운 날씨 속에서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럼에도 평범한 하루하루 속에서, 어떤 때는 그저 다른 즐거운 일들을 하며 하루를 보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뉴스를 보며 분노하기도 한다. 어떤 것도 확실히 말할 수 없는 때에 공존하는 불안이 불쑥고개를 치켜드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 같이 춤을 추자. 살아있다는 표현과 저항을 하자. 각자가 각자의 마음으로, 언젠가 마음껏 즐거움을 표현하는 춤을 출 때까지.

 

 

¹호시노 겐, 「생명의 차창에서」, p.13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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