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를 보러 간다고 하면 종종 듣는 반응이 있다.
"그걸 왜 봐?"
분명 시비 거는 말투는 아니다. 저 사람은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다. 그런데 왠지 나는 울컥해서 맞받아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런데 정작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재밌어." 한 마디로 뭉그러뜨리곤 한다. 그리고 이렇게 뭉개면서 스스로에게 다시 묻곤 했다.
나는 왜 그림을 보러 가는 걸까?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 '텍스트힙' 트렌드처럼, 전시를 보러 가는 나에게 취하는 것도 한몫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전시를 소비하는 내가 좋은 걸지도. 그럼에도 내가 예매하는 전시가 있고, 선뜻 용기가 안 나는 전시가 있다. 아무리 멋진 척을 해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걸 보고 싶다. 갤러리에 가서 그림을 마주했을 때 뭘 봐야 할지 몰라 어색한 기분을 느끼긴 싫으니까!
AI 시대 속에서 그림을 감상한다는 것
<감상의 심리학>은 그림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감상의 즐거움을 느껴보지 않겠냐고 권한다.
비단 전시를 왜 보는지 뿐만 아니라, 많은 것들에 '왜'냐고 질문하는 때가 왔다. 인공지능이 모든 것을 척척 대신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창작도 수준급으로 해낸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점점 우리의 존재에 대해 더 많이 질문한다. 기존의 일을 굳이 할 필요가 없는, 텅 비어버린 시간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권태도 느끼기 시작했다. <감상의 심리학>은 바로 이런 시대에 그림 감상의 유용성을 이야기한다. 책이 처음과 끝에서 강조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인공지능이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감상의 즐거움만큼은 대신할 수 없다."
감상은 객관적인 걸까?
많은 책이 그렇듯, 중요한 메시지가 앞부분에 자리한다. 사실 나는 예술이 '객관적인' 감상이 가능한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는데 첫 장에서 '우리가 모두 동일한 시각 기제를 갖고 있다'는 포인트를 저자는 제시한다.
책은 12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목차가 많아 보이지만,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구조라 술술 읽힌다. 질문이 계속 생겨나는데 그다음 장에서 곧바로 이를 풀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자는 같은 그림을 활용해 여러 번 다양하게 설명한다. 윌리엄 웨그먼의 <떨어지는 우유>를 3장에서 시간적 집단화를 통한 서사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12장에선 작품에서 벌어지는 '기대 오류'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특히 현대예술 얘기가 많이 나오는 책의 후반부에서 많은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현대예술을 감상할 때는 앞서 배운 모든 감상법이 총동원되는 느낌이었다. 동일시, 경외감, 경험 개방성, 내러티브과 아비투스로 인한 집단 평가 등의 개념이 뒤섞이며, 나의 취향과 주관이 착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의 역사는 재현, 표현, 인상, 추상과 초현실, 개념을 그려왔다. 그림 감상의 순서도 이를 따라가는 것 같다. 그림 감상 모형은 '지각 처리, 인지 처리, 감정 처리, 평가'의 순서이다. 무엇이 표현되었는지, 그림 속 콘텐츠에 초점을 맞추다가 곧 그림의 형태와 색, 스타일과 구성을 본다. 예를 들어, 질감도 화가에게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즉 '콘텐츠 너머의 콘텐츠'를 보기 시작한다. 저자는 이것이 초심자와 전문가의 차이라고도 말한다.
감상은 지각적 분석, 비교, 인지적 해석, 의미 부여, 감정적 각성, 심미적 판단 등 창작 못지않게 창의적인 과정이며 능동성이 중요하다. 그리고 감상하는 동안 일어나는 심리적 즐거움은 피드백과 보상이 된다. 감상의 경지에 깊게, 빨리 도달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객관적 감상은 도움이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책을 따라가며 다양한 작품들을 함께 탐구해 보는 연습이 즐거웠다. 그래서 마지막엔 저자의 말을 적극적으로 믿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저자가 언급하진 않았지만, 그림 감상의 또 다른 장점이라고 느낀 게 있다. 그림 감상은 예술 감상의 기본 단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 감상은 다른 예술 장르에도 적용 가능한 감상법을 제공한다. 책의 전체적인 전제, '우리가 모두 동일한 시각 기제를 갖고 있다'는 면에서 그렇다. 그림은 사진과 영화에도 영향을 미쳤고, 미술을 ‘행위 예술’로 본다면 공연과도 접점이 있다. 결국, 우리가 시각적으로 보는 모든 것이 미술의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 제시하는 감상법은 그림뿐만 아니라 예술 전반을 이해하는 데 적용될 수 있다.
감상은 살아있다는 감각이다
이 책은 철저히 ‘감상의 심리학’에 집중한다. 화가들을 소개하는 ‘취향의 심리학’이 아니다. 감상을 돕는 책이지만, 취향을 대신 찾아주지는 않는다. 취향은 독자가 직접 전시장을 방문하며 스스로 찾아야 한다. 다만 이 책은 우리가 취향의 근거를 탐색할 수 있도록 언어화하고 개념화해 준다. 덕분에 나는 내가 그림 감상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명확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책을 읽고 나서, 그림 감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는 '인상'이며, 두 번째는 '사전 지식'이다. (음, '주관적' 감상과 '객관적' 감상의 다른 말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점에서 감상은 여행과 닮아 있다. 사전 정보를 지니고 가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게 많다.
2023년, 나는 영국과 스페인에 여행을 갔었다. 첫 여행지는 영국이었다. 영국 영화를 워낙 좋아해 미디어로 자주 봤던 풍경이 있었다. 그러자 내가 역사를 알았더라면 모든 곳이 놀이공원 같았겠다는 생각에 미쳤다. 특히 내셔널 갤러리, 빅토리아 앨버트 뮤지엄을 갔을 때는 그런 생각이 더욱 들었다.
상대적으로 낯선 스페인에 가자 사용하는 언어도 완전히 달라지고, 사전 조사를 꼼꼼하게 해 간 것도 아니어서 다소 어안이 벙벙한 채 다녔다. 그렇지만 내가 아직도 그때의 유럽여행에서 제일 잊을 수 없는 순간을 통틀어 하나만 꼽으라고 하면, 스페인의 2층 관광버스에서 노을을 봤을 때이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핑크빛 하늘아래 나는 '살아 있었다'. 그때는 스페인어를 알아듣는 것도, 스페인의 관광명소를 꿰고 있는 것도 상관없었다. 그저, 내가 살아 있었다.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 그게 예술에게 받는 진정한 선물 아닐까?
그런 이유로 '인생 작품'을 만나는 건 전문성과는 필요 없는 영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만큼은 사전 지식보다, 그냥 느껴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많은 이들이 로스코 그림을 보고 갑자기 눈물이 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림은 마음의 창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카타르시스가 일어나며, 억눌린 감정을 배출하고 영혼은 맑아진다.
자, 내 지인이 다시 물으면 나는 뭐라고 답하면 좋을까?
우리는 왜 전시를 보고, 공연을 감상하는지. 감상이란 단순히 예술을 ‘보는 것’이 아니다. 감상은 질문하고, 생각하고, 나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이다. 내가 살아온 모든 과정이 동원된다. 그리고 이 과정은 AI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경험이다. 감상은, 우리를 존재한다는 걸 상기시킨다.
"인공지능이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감상의 즐거움만큼은 대신할 수 없다."
책 속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진 문장이었다.
책은 객관적인 그림 감상법을 알려주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흥미롭게도 우리 각자가 저마다 다른 감상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결론을 가지게 되었다. 객관적인 감상법은 도구일 뿐, 하늘 아래 같은 감상은 없을 것이다.
AI 시대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철학이 다시 중요해졌다. 인공지능이 창작을 대신할 수는 있어도, 감상의 주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감상은 능동적인 사고 과정이며, 개인의 경험과 감각이 결합된 행위다. 오늘 듣는 노래만 하더라도 어제 듣는 노래와 오늘 듣는 노래가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가. 예술을 감상하는 순간, 우리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창조적인 해석자가 된다.
결국, 감상의 심리학이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심리학이 아닐까. 당신도 아직 찾지 못한 예술 작품이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당신만의 ‘첫눈에 반하는 작품’을 만나는 순간, 감상의 즐거움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아직 자신에게 맞는 예술 작품을 찾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저자의 "어쩌면 당신은 아직 자신에게 맞는 예술 작품을 찾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무엇보다도 공감했다. 나 역시 뮤지컬을 처음 접했을 때, 그 매력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내 취향을 찾게 되었다. (지금은 한 달에 기본적으로 4편은 보는 것 같다!) 인생 작품을 만나려면, 단순히 지식의 유무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경험을 했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다.
책에서는 그림 감상의 첫 번째 단계로 다양한 그림을 최대한 자주, 많이 보는 것을 추천한다. 내가 그림과 친해진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팁 1: 예술 뉴스레터 구독하기 – 정기적으로 예술 관련 정보를 받아보며 자연스럽게 감상 기회를 늘린다. 하루에 한 그림을 보내주는 'Random Daily Art'를 추천한다.
팁 2: Google Art & Culture로 랜선 미술관 방문 – 세계적인 미술관을 집에서 감상할 수 있다.
팁 3: 한 작가만 탐구해 보기 – 특정 작가의 작품을 파고들며 취향을 발견한다. (여러 대중매체에 많이 쓰이는 알폰소 무하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