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예술 서적 리뷰를 줄이고 다양한 문화 초대에 응하려는 작은 다짐이 있었다. 이 책의 제목을 본 순간 뭔지 모를 의무감이 들어서 초대에 응하게 되었다.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요즘 '화가들의 꽃'이라는 책을 읽고 있어"라는 말에 웃으면서 반응할 테고 나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 글을 다 읽고 마지막에 나오는 에디터 정보를 보고 그렇구나 할 수 있겠다. 어쩌다 꽃이라면 지나칠 수 없게 된, 어쩌면 운명.
어릴 적부터 꽃에 대한 노래, 그중에서도 제목이나 가사에 '장미'가 들어가는 노래를 수도 없이 들으며 자랐다. 부모님이나 친척들은 전혀 그러지 않았는데 오래간만에 본 사람들이면 놀리려고 한 소절씩 나에게 들려주었다. 장미 향은 내 취향이 아닌 것 같다고 했지만 어느새 장미 향 향수가 세 개까지 증식했다. 운명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작 장미꽃으로 유명한 미술작품을 얘기해 보라고 하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좋아하는 꽃그림은 몇 있는데 장미는 도통 생각나지 않아서 구글에 famous rose paintings를 검색해 보기까지 했다.
책에는 108가지의 꽃 그림이 실렸다. 그만큼 글자수가 적었는데 이걸 정보량이 많다고 해야할지, 적다고 해야할지. 장미 그림을 추리고 여러 검색엔진과 번역기를 통해 화가와 그림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꽃놀이는 신났는데 꽃 그림은 여전히 어려웠다.
표지에서부터 옅은 분홍 장미를 발견할 수 있다. 앙리 마티스의 '노랑의 조화'라는 작품으로 테이블 위에는 장미 한 다발이 꽂힌 녹색 화병이 그림의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벽지는 꽃무늬이며 무늬 있는 커튼 그리고 노란 휘장이 늘어져있는 유난히 강렬한 그림이라 어떻게 보면 꽃이 전혀 화려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옅은 빛깔만큼의 화사함만 보여주는 그런 장미 그림.
앙리 마티스의 '창가의 사프라노 장미'
표지와 마찬가지로 옅은 빛깔의 장미가 그림의 정중앙에 있는데 찾아보니 사프라노 장미가 연한 살구빛이나 노란색을 띠는 품종이라고 한다. 이 종은 장미꽃이라고 하면 다들 떠올리는 하이브리드 티 장미에 속하는데 꽃이 크고 향이 좋고 색이 예쁘다고 한다. 중국이 원산지인 장미와 유럽의 오래된 품종의 교배로 만들어진 꽃이라고 하니, 프랑스 휴양지가 배경으로 놓인 이유까지 알 수 있었다.
존 싱어 사전트의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제목에서도 화면에서도 비중이 큰 건 백합인데, 유명한 장미 그림의 검색 결과로 여럿 등장했으나 장미 그림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서론에 장미에 별 관심이 없던 존의 커리어를 바꾼 유명한 작품이라고 나와있는데 작가도 작품 명도 초면이었지만 그림만큼은 익숙했다. 흐드러지게 핀 꽃 사이에 흰 드레스를 입은 짧은 머리의 소녀 둘은 요정 같기도 하고 인형 같기도 하다. 늦은 시간이라 어둑한데도 소녀도 꽃도 부드럽고 화사하기만 하다. 간단히 말해 예쁘다.
사실 이 그림이 비교적 현대 작품일 거라 생각했는데 제작연도를 보니 빅토리아 시대였다. 찾아보니 빅토리아 시대에 정원을 꾸밀 때 색과 품종이 다양하고 향기로운 장미가 인기였다고 한다. 이러한 문화는 상류층이 부유함을 드러내는 수단으로도 쓰였다는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장미의 품종 정보는 없어서 두 소녀가 어느 정도로 부유한 집안의 자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앙리 판탱라투르의 '장미'
캔버스 위에는 탁자와 화병 그리고 장미꽃이 전부이다. 우리가 아는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장미가 아주 섬세하게 화폭으로 옮겨졌다. 겹겹의 꽃잎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색을 가지고있어 '탐스러운 꽃봉오리'라는 표현에 딱 맞아떨어진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든 앙리는 프랑스 화가인데 장미를 좋아하는 영국에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장미의 영혼'
드디어 꽃 옆에 사람이 등장했다. 인물화가 아니라 꽃향기에 취해있는 여인의 옆모습이다.
앞서 등장한 장미들과 달리 이쪽은 덩굴장미이다. 여성의 키만큼 자란 장미와 장밋빛 뺨의 여성. 존 윌리엄 위터하우스는 로마 신화와 같은 문학작품의 영향을 받은 라파엘 전파의 영향을 받았다는 배경지식을 급하게 장착하고 보니 무언가 해소된 느낌이었다. 그림 속 여성을 향한 친숙한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화면 속 존재를 보는 것 같은 거리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