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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자신에게 확신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자신감 있게 ‘네’라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아무래도 많진 않을 것 같다. 어쩌면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자신에게조차 확신이 서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공동체와 사회를 신뢰할 수 있겠는가. 갈수록 낮아지는 듯한 공동체 내의 신뢰는 사회 분위기를 더욱 경직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서 어떠한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 견뎌내는 것이 맞을지 갈팡질팡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부부관계로 시작하여 모녀 관계로 무너진 사회적 신뢰를 보여준다. 영화가 시작된 후,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하지만, 무시 혹은 거절을 당하는 남편 웨이먼드와 수북이 쌓인 영수증 더미 속에서 골머리를 앓는 에블린은 극단에 놓인 사람처럼 맞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세탁물에 눈알을 붙여놓은 웨이먼드가 우유부단하며 답답해 보이기까지 한다. 에블린만 당장 눈앞에 놓인 생계와 관련한 세금 처리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또한, 딸 조이와의 관계 또한 순탄치 않다. 여자 친구를 데려온 조이를 본 에블린은 할아버지가 놀란다며 조이가 퀴어란 사실을 숨기려 한다. 세상 물정 모르는 것 같은 남편과 “정상적”이지 못한 딸을 둔 에블린만 고달픈 인생에서 고군분투하는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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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증 더미를 헤집던 에블린은 세금과 관련한 면담을 진행하기 위해 국세청으로 향한다. 국세청에선 영수증들 속에서 에블린은 자신이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지 세금 조사관에게 증명 해야만 한다. 그때, 세금 조사관은 영수증 더미를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이 보인다고 말한다. 에블린은 영수증에 찍힌 소비들 속에서 정확히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돈을 지출하였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녀는 답을 찾지 못한 채, 끊임없이 허둥대기만 한다. 에블린의 인생 또한 그러한 것이다. 어디서부터 시작인지 정확히 짚을 수 없는, 어디까지가 문제인지도 짐작 가지 않는 진퇴양난의 상황 말이다.


영수증으로 은유된 에블린의 삶처럼 에블린은 관계 그 자체 혹은 관계 간의 연결의 가치를 잊은 채, 자본에 잠식되어 그것을 1순위로 상대하며 살아가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치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최소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선 경제적인 문제가 우리에게서 가장 많은 에너지를 빼앗는다. 인간이 생산적인 활동을 하여 경제적 소득을 얻는 행위는 뒤집어 생각하자면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하지만 여기엔 물음이 뒤따를 수 있다. 대체 왜? 왜 우리는 살아가며 맺은 여러 관계와 관계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연대감 등의 가치를 잊은 채 자본 속에 잠식되어 버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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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블린은 알파 웨이먼드를 만나 멀티버스의 존재를 알게 되고, 여러 우주에서 자신의 다양한 가능성을 엿보게 된다. 그렇게 에블린은 더더욱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우주 속에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다. 더 나은 자신이 될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수한 선택의 기로에 대한 후회는 결국 ‘모든 것은 부질없음’으로 귀결시킨다. 과거의 나를 파헤치며 현재의 나를 부정하는 순간 따라붙는 허무와 회의감은 조부 투파키를 만들어낸 것이다. 조부 투파키는 모든 것을 통달해 버렸기에 소멸을 원한다. 하지만 조부 투파키가 그토록 여러 우주를 건너다니며 에블린을 찾았던 것은 에블린의 존재를 온 우주에서 지워버리겠다는 것이 아닌, 자신과 비슷한, 자신을 이해해 줄 에블린이었다. 모든 회의와 후회 속에서도 사고의 시발점은 “이해를 바라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에블린은 점점 조부 투파키화 되어가는 듯하였지만, 결혼하지 않은 다른 세계관에서 웨이먼드를 만나곤 깨닫게 된다. 친절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에겐 바보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방식은 인생을 살아낼 힘이자 무기라는 사실을 말이다. 삶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소소한 순간과 가치들을 잊고 산 에블린에게 웨이먼드가 보여주는 삶의 태도는 너무나도 1차원적이고, 당연한 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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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단순하다. 복잡한 일은 세상에 널렸지만,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 것들은 단순한 것들이 훨씬 많다. 이미 복잡한 일투성이인 삶 속에서 누구인들 안 그렇겠는가. 내가 복잡한 삶을 살고 있다면, 상대방 또한 비슷한 삶일 것이다. 결국, 언제든 친절함을 기본으로 둔 채 살아가자는 말은 큰 힘을 가진다. 웨이먼드의 말처럼 그것이 무기가 되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의 의지를 모조리 꺾어버릴 수도 있다. 당장 나라는 존재가 이 우주에서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세상은 잘 돌아갈 것이고, 거시적 관점에서 보았을 땐 개인의 존재 소멸은 이 세상이 순환되는 것에 아주 조금의 영향조차 미치지 못할 수 있다. 이러한 허무주의와 회의주의에 맞서 우리는 친절과 다정이란 무기로 무장해야 한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웨이먼드에서 에블린으로 그리고 마지막 조부 투파키이자 조이로 이어지는 다정함의 각성은 결국 연대를 상징한다. 당장 이해되지 않는 것, 받아들일 수 없는 것과 혼란스러운 감정이 존재하였지만, 공허의 베이글 블랙홀 속으로 빠져들어 가려는 조이를 세게 안아 붙잡는 에블린과 그의 가족들이 보이는 사랑과 의지는 결국 스크린 밖의 관객들에게까지 다정함의 힘을 믿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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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모든 다정과 친절은 개인의 노력 차원에서는 결코 영구적으로 유지되진 못할 것이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를 넘어 사회의 다정을 유지하기 위해선 사회체제가 다정함의 근거로서 작동되어야만 한다. 개인이 사회를 믿고 다정을 택할 수 있도록 말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소수자성이 교차 되는 영화다. 그리하여 더욱 뭉클하게 우리를 압도하면서도, 미국 사회 내에서 동양인의 위치를 체감하게 되는 듯하여 한편으론 씁쓸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그게 무엇이건 계속 믿음을 놓지 말고, 나아가보자는 듯 우리에게 손을 건네온다. 이 지점이 영화의 가장 다정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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