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세계는 다시금 극우 포퓰리즘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있다. 유럽에서는 반이민 정서를 내세운 극우 정당들이 세력을 확장하고, 미국과 영국에서는 보호무역과 민족주의를 앞세운 정치 흐름이 되풀이된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계엄령 논란 이후 정부의 권력 구조는 점차 경직되어 가고 있으며, 강한 지도자를 향한 대중의 갈망은 새로운 형태의 선동과 배제를 통해 증폭되고 있다.
포퓰리즘은 단순한 정치적 흐름이 아니다. 그것은 대중의 감각을 조작하고, 특정한 정서를 조직하며, 단순한 해법을 제시하는 서사적 장치다. 흥미로운 점은, 연극 역시 감각을 조작하는 예술이라는 점이다. 과거 독재 정권들은 예술을 선전 도구로 활용했으며, 국가의 이념을 대중에게 내면화시키기 위해 강렬한 서사적 기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예술은 단순한 도구로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시대를 조종하는 힘이 될 수도 있지만,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해체 기제가 되기도 한다.
극단 돌파구의 구미식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을 기반으로 하지만, 단순한 각색이 아닌 포퓰리즘이 작동하는 방식을 연극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구미식은 관객을 단순한 감상자로 머물게 하지 않는다. 대신, 포퓰리즘적 논리가 우리의 인식을 어떻게 조직하는지를 직접 경험하게 만든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포퓰리즘은 어떻게 우리를 조종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 개인의 억압에서 사회의 억압으로 – 유리동물원과 구미식이 보여주는 포퓰리즘의 작동 방식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은 20세기 대공황기 미국 사회의 한 가정을 배경으로 한다. 작품의 중심에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톰이 있다. 그는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감과 예술적 자유를 향한 열망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여동생 로라는 사회와의 접점을 잃고 자신만의 작은 세계, 유리 동물 컬렉션 속에 갇혀 있다. 어머니 아만다는 과거의 영광에 매달리며 현실을 부정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 가족은 서로를 억압하고, 변화하지 못한 채 결국 무너진다.
구미식은 이 서사를 보다 급진적으로 변형한다. 원작에서 톰이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려 했다면, 구미식의 톰은 사회 자체에 의해 배제된 존재다. 그는 클로짓 게이이며, 마약 중독자이고, 노숙자다. 사회는 그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특히, 공간의 변화는 이러한 구조적 차이를 극대화한다. 원작에서 톰은 가족이라는 공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하지만 구미식의 톰은 어디에도 갈 곳이 없다. 연극의 무대는 협소한 공중화장실로 제한되며, 이는 사회라는 거대한 감옥을 상징한다. 이 폐쇄된 공간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탈출구가 사라진 세계를 의미하며, 구미식의 핵심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강화한다.
아만다 역시 단순한 보수적인 어머니가 아니다. 구미식에서 그녀는 '톰'이 나온 고등학교의 교장선생님으로 극우 포퓰리즘의 논리를 내면화한 존재로 그려진다. 그녀는 과거의 질서를 신봉하며,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더 약한 존재를 배척하는 방식으로 해소한다. 이를 통해 포퓰리즘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관통하고, 대중의 감정을 조직하는지를 서사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포퓰리즘은 사회적 약자들의 불안을 조직하고, 그것을 더 약한 존재들에게 투사하게 만든다. 태극기부대의 주요 구성원들이 자신들을 착취한 기득권이 아니라, 페미니즘과 이주민, 진보 세력을 공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교장선생님 캐릭터는 포퓰리즘의 메커니즘을 그대로 체현한다. 그녀의 분노는 구조적 원인이 아닌, 자신보다 더 약한 존재들에게 향한다.
구미식은 이러한 포퓰리즘의 작동 방식을 연극적 서사 속에서 해체한다.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포퓰리즘이 만들어낸 괴물 같은 존재로 톰을 그리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의 핵심이다. 그는 약에 취한 채 세상을 바라보지만, 그의 시선조차 조작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결국, 현실과 허구를 구분할 수 없는 존재로 남게 되며,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모순을 반영한다.
# 선동의 연출과 조작된 감각 – 20세기 독재자들의 선전 기법과 구미식의 무대
<구미식>은 연출에 있어서도 이러한 포퓰리즘의 매커니즘을 그대로 따 온다. 실제로, 포퓰리즘은 정치적 전략이라기보다 감각을 조직하는 방식에 가깝다. 대중은 논리적 설명보다 시각적이고 정서적인 자극에 반응하며, 특정한 이미지와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접하면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히틀러는 군중 집회를 통해 이러한 감각을 연출했고, 스탈린과 마오는 거대한 퍼포먼스를 활용해 체제의 논리를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정치적 설득에 머물지 않고, 시각적 경험을 통해 권력을 공고히 하는 방식이었다.
구미식은 이런 선전 기법이 작동하는 과정을 무대 위에서 드러낸다. 특정한 공간과 조형물이 권위를 획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인물들이 그 안에서 의미를 형성하는 방식이 연극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 작용한다. 선전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관객이 직접 경험하도록 만들면서, 무대 위에서 형성된 감각이 현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질문하게 한다.
일례로, 히틀러는 연설을 말의 영역에 가두지 않았다.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서는 거대한 탐조등과 깃발을 배치해 공간을 신화적 장소로 만들었고, 대중은 동일한 제스처와 구호를 반복하면서 집단적 감정을 공유했다. 특정한 감각이 형성되는 순간 개인의 존재감은 흐려지고, 오직 집단적 정체성이 강조되었다. 연설이 끝난 뒤 모든 사람이 히틀러를 향해 같은 자세를 취하는 장면에서는 퍼포먼스를 넘어 하나의 신념이 완성되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연출 방식은 구미식의 ‘행복한 동상’ 장면에서 다시 반복된다. 무대 위에서 동상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인물들의 태도와 반응을 통해 권위를 획득한다. 인물들은 일정한 방식으로 반응하고, 특정한 동작을 수행하며, 시간이 흐를수록 숭배의 방식이 체화된다. 독일의 집회에서 히틀러가 군중의 동선을 결정했던 것처럼, 연극 속 동상은 그것을 둘러싼 인물들의 움직임을 조정하며, 특정한 감정을 지속적으로 유도한다.
히틀러의 집회가 공간을 활용했다면, 미디어를 통한 시각적 연출도 선전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레니 리펜슈탈의 영화에서는 히틀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존재처럼 등장하며, 빛 속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군중을 촬영하는 방식에서도 동일한 패턴이 반복된다. 거대한 공간 속에 질서정연하게 정렬된 인간 군상은 하나의 유기적 구조처럼 보이며, 개인이 아니라 거대한 기계의 일부처럼 인식된다.
구미식에서도 특정한 장면에서 조명과 무대 배치를 활용해 인물들을 강조하는 방식이 나타난다. 동상을 향한 숭배 장면에서 조명이 특정 인물을 극적으로 비추며, 관객의 시선을 유도한다. 무대 위에서 한 인물이 강한 조명을 받으며 중심에 놓이는 방식은 히틀러 선전 영화에서 군중 속 히틀러의 위치와 비슷한 효과를 만든다. 하지만 동일한 연출 기법을 활용하더라도 그것이 유도하는 감각은 다르게 작동한다. 히틀러의 연출이 대중을 설득하는 장치였다면, 구미식은 그 조작의 순간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활용된다. 특정한 인물이 강조되는 과정이 명백하게 인위적이라는 점을 관객이 인식하게 되면서, 연출된 감각이 신념을 형성하는 구조 자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 역사적 반복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 – 포퓰리즘이 만든 비극의 과정
포퓰리즘이 작동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언제나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히틀러의 독일에서, 스탈린의 소련에서, 마오쩌둥의 중국에서, 권력을 잡은 지도자는 처음에는 국민을 대변하는 듯 보였지만, 점차 더 많은 사람을 배제하고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체제를 유지했다. 정치적 구호와 선전 속에서 가장 취약한 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체제의 적이 되었고, 군중의 광기 속에서 하나둘 사라져 갔다.
나치는 독일의 몰락을 유대인의 탓으로 돌렸다. 경제 불황과 전쟁의 패배로 분노에 휩싸인 군중은 자신들의 고통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깊이 고민하지 않았고, 히틀러가 제시한 적을 향해 증오를 퍼부었다. 처음에는 반유대주의적 법률이 만들어졌고, 곧이어 유대인들이 공직에서 쫓겨났으며, 나치 돌격대가 유대인 가게의 창문을 깨부수기 시작했다. 나치는 점진적인 방식으로 이들을 사회에서 격리했다. 독일 시민들은 거리에서 사라지는 이웃을 보면서도 그것이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제수용소는 유대인에게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장애인, 성소수자, 로마인(집시), 공산주의자, 반체제 예술가도 그곳으로 보내졌다. 포퓰리즘이 군중을 선동할 때, 가장 약한 계층부터 희생되었고, 그들의 죽음을 본 나머지 사람들은 침묵을 배웠다. 그렇게 600만 명이 학살되는 동안 독일 사회는 조용했다.
스탈린은 적을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찾았다. 공산주의 혁명의 실패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당 내부에 반혁명분자가 있다고 주장했다. 가장 먼저 숙청된 것은 정치적 반대자들이었고, 그다음은 군 장성들이었고, 그 후에는 지식인과 예술가, 그리고 노동자와 농민이었다. 굴라그로 끌려간 사람들은 대부분 정치적 혐의를 인정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채 자신이 왜 체제의 적이 되었는지 모른 채 죽어갔다.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는 생산성이 낮다는 이유로 반혁명분자로 몰렸고, 농민들은 국가가 정한 생산량을 채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총살당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집단 농장화를 강요하는 과정에서 인위적인 기근이 발생했고, 수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 굴라그에서는 죄수들이 눈보라 속에서 끝없이 도로를 깔고 철도를 놓았지만, 결국 그 길을 달릴 기차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적 약자를 희생시키면서 구축한 체제는 공포를 통해 유지되었고, 시민들은 서로를 감시하며 국가에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마오쩌둥은 더욱 대중적인 방식으로 선동을 조직했다. 그는 혁명을 지속해야 한다고 말하며, 반혁명 세력을 색출하는 것이 국가의 과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반혁명분자가 누구인지 명확한 기준은 없었다. 마을 회의에서 누군가가 "저 사람은 부르주아 같다"고 말하면, 그 사람은 다음 날 사라졌다. 대약진운동으로 수천만 명이 굶어 죽었고, 그 책임을 물을 곳이 없어진 마오는 문화대혁명을 선포하며 홍위병들에게 "체제의 적을 찾아내라"고 명령했다. 교사와 학자들은 학생들에게 두들겨 맞았고, 예술가들은 광장 한가운데 끌려나와 공개적으로 모욕당했다. 거리에서는 지식인들이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이 얼마나 반동적인 삶을 살았는지 고백해야 했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동료를 고발했고, 누구도 자신이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남들보다 더 강하게 체제에 충성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부터 사라졌고, 가족을 고발한 자식들과 이웃을 죽인 군중만이 남았다.
구미식은 이 과정을 연극적으로 재현한다. 극 중에서 톰은 처음에는 단순한 문제적 존재로 보인다. 그는 사회적 규범에서 벗어난 사람이지만, 처음부터 제거되어야 할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극이 진행될수록 그의 위치는 점점 더 위태로워진다. 사회는 그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하고, 결국 그를 정상적인 틀에 맞추려 하거나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생긴다. 그것은 단순한 이야기 속 설정이 아니다. 역사가 보여준 방식대로, 사회가 포퓰리즘의 논리에 빠지는 순간, 톰과 같은 사람들은 언제든지 가장 먼저 희생될 수 있다. 연극이 끝난 후에도 톰과 같은 인물들은 현실 속 어딘가에 남아 있으며, 그들이 사라지는 과정은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현재에도 반복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 결론
포퓰리즘은 언제나 희생자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것이 연극적으로 재현될 때, 우리는 그 구조를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것이다. 우리는 그냥 관객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조작된 감각의 흐름을 깨달을 것인가? 구미식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가 믿고 있는 세계는 정말 우리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