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물어야 할 안부가 많다. 사람 말고 내 주변에 놓인 크고 작은 사건들에게 물을 안부. 가만히 두면 희미한 장면으로 남아 이름 없는 기억이 될 사건들은 종종 글이 된다. 이어지는 문장 속에서 선명하게 사건을 증언한다. 그 증언을 쌓는 쓰기는 지극히 사사로운 행위다. 적어도 사사롭게 시작된다. 사는 데에 그리 필수적이지 않은 일. '사람'을 말하는 대부분의 글쓰기는 대개 홀로 자처한 일이고 외롭게 겪는 일인 것 같다. 그리고 이 외로움은 몇 년째 익숙해지지 않아 새로운 빈 화면 앞에 앉은 나를 아득하게 만들곤 한다.
뭐 하러 써, 덮어두자. 그러면 그만일 사소한 사건들이 나를 재촉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이대로 날 잊을 거냐고, 아우성친다. 실제로 재촉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나는 은근히 그리고 속절없이 세상이 바라지도 않은 고백을 문장으로 옮기는 지난한 여정을 다시 시작한다. 부끄러운 증언이 될 수도 있으니,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쓴다. 쓰는 사람들은 늘 그렇게 어딘가에 숨어있는 걸까. 내가 이렇게 숨어있잖아, 어딘가에 똑 닮게 숨어 쓰는 사람들이 있을 거야. 외계 행성에 홀로 선 기분으로 중얼거린다. 기회가 된다면 이들과 안부를 주고받고 싶다는 소망은 이런 외로움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비가 쏟아지는 늦가을 어느 날. 성은 님과 윤지 님을 만났다. 11월부터 내년 2월까지, 4개월이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느슨하게 마주할 쓰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들의 글을 미리 읽어보지 않은 것을 후회한 것도 잠시, 우리는 ‘글’ 하나를 두고 모임 동안 나누고픈 대화 주제를 쉼 없이 꺼내기 시작했다. 평소에 어떤 글을 쓰는지 말하며 자기소개를 한 우리는 거의 3시간 동안 얘기 나눠보고 싶었던 것들을 나열했다. 글 쓸 때 고민은 무엇인지, 요즘 읽는 글쓰기에 관한 책은 무엇인지, 글을 쓸 때 작업 환경을 어떻게 하는지, 슬럼프가 오면 어떻게 견뎌내는지, 바쁜 일상에서 글쓰기를 어떻게 해내는지 등등. 글 쓰는 마음 한구석에 꽁꽁 박혀있던 고민이 이렇게나 많았나 싶을 정도로 이야기가 나왔다. 답답함을 가득 안고서도 우린 글을 쓰고 있구나, 새삼 깨달았다.
이번에는 유독 ‘음악‘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다. 평소 음악을 듣긴 하지만 이렇게 주제로 두어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라 내겐 좋은 의미로 생소한 시간이었다. 음악을 공부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나는 내게 음악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됐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있긴 한데, “이 두 곡은 정말 아껴 들어요.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려서...”* 그런 얘기를 하다가 함께 음악을 주제로 글을 쓰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말까지 나왔다. 음악을 주제로 글을 써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것도 음악에 관한 내 이야기를 글로 써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쓸 수 있을까, 문득 낯선 기분이 들어 스스로에게 의문을 표했지만 내 속을 직접 어루만지는 이 노래에 관해서 무어라도 읊어보면 마음 깊은 구석에서 무언갈 발견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살펴볼 만할 미지의 영역이 있다. 이따금 그 작은 소망에 낯섦을 내팽개치는 나는 쓰고 싶은 얘기가 생각날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현실을 쫓아가느라 글쓰기가 흐지부지해지는 가운데, 노래 한 곡과 함께 나만 아는 고요한 사건을 겪었다. 이건 언젠가 꼭 쓰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고, 이 계기를 마련해준 그들에게 글 소식을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이렇게만 말하지 말고 꼭 쓰렴 예찬아).
*새소년의 노래. <난춘>과 <눈>
그리고 ‘환장하겠네‘ 말마디가 떠오른다. 어쩌다 이 말이 나왔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모두가 겪는 중인 정신 없는 세상을 보며 한탄하다 그랬던 것 같다. 환장하겠네... 환장하겠네...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리다가 이 말로 시작하는 글쓰기를 하면 재밌을 것 같다고 얘기했다. 순간 다들 무언갈 떠올렸는지, 당장의 웃픈 세상이 훅 와닿은 건지 조금씩 피식거렸다. ‘환장하것네…’ 속으로 외치자면 체념하는 슬픔이 가득한 속에서 무어라도 지껄여볼 수 있을 것 같다. 이건 생각보다 비밀스러운 영감의 샘일지도 모른다. 후일에 그 답답한 속을 견디지 못하고 ‘환장하겠네’와 비슷한 감정선의 글을 하나 끄적였다. 비속어가 들어가서 공개적인 곳에 올리기가 망설여진다만, 퇴고를 마무리 해서 내 글을 모아두는 공간에 놓아둘 예정이다.
마지막 모임 날에는 단조로운 일상에 관해 얘기했다.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얘기하던 찰나에 나온 얘기였다. 나는 한창 고민 중이었다. 이제부턴 사람들과 무슨 얘기를 나눠야 하는지, 나는 무엇을 나눌 수 있는지. 그 답을 여전히 모르겠어서 어떠한 글을 꾸준히 쓰겠다고 선뜻 다짐하기가 망설여지던 참이었다. 에세이를 쓰고 싶단 생각만 어렴풋이 들고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는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누군가처럼 용기가 있다거나 대단한 계기가 없어서 특별한 일 없이 단조로운 일상을 반복하는 우리가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윤지 님께 대학원에서 음악을 공부하는 일상을 에세이로 써도 궁금해할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고 말씀드리고, 성은 님이 슬픔이 닥쳐올 때 이 어지러움과 외로움을 처리하는 방식에 관해 쓰고 싶다고 말씀하셨을 때, 누군가의 단조로운 일상이 상대에겐 낯설고 특별한 이야기로 다가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다시금 엿보았다. 하지만 나는, 내가 가진 단조로운 일상 속 특별함은 무엇일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사실 잘 모르겠다.
그날의 모임 동안 있었던 대화를 기록한 노트 페이지엔 이런 문장이 남았다. ‘단조로움 속에서 발칙해지고 싶다,' 그런 에세이를 쓰고 싶다. 이게 어떻게 글이 될지 혹은 그냥 잊혀버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법 매력적인 소망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내 속에 든 걸 꺼낼 때, 무표정으로 툭 피식거리는 정도의 발칙함을 드러내 보일 수 있진 않을까. 그럴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한 마음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글을 끄적이고 있다.
나긋나긋하게 시작한 모임은 꼭 비슷한 온도로 끝을 맺었다. 써왔던 것. 쓰고 싶은 것. 써야 하는 것과 쓰고 싶은 글들이 내 안에서 밖으로 나왔고, 그것들의 손을 붙잡고 외계 행성으로 돌아왔다. 혼자 중얼거렸다면 형체도 없이 잊힐 뻔한 글에 관한 기억과 글에 관한 마음들이 한결 또렷하게 존재하는 사이에 앉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 쓰는 나’를 증명할 모든 시점의 글들이 다시금 나타날 수 있던 이유는, 이 글들이 내 입 밖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 있게 한 모임의 자리와 서로 나눈 안부 인사 덕분이었을 테다. 쓰는 자리는 곧 다시 외로워질 테지만, 함께 듣고 나누었던 이 시간을 떠올리며 문장으로 증언하는 삶을 지속해 나갈 것이다. "요즘 어떤 글 쓰세요?" 언제든 그 안부 인사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