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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구미식'은 부산스러운 자극들에서 느끼는 불쾌감과 공감에서 파생된 슬픔을 느끼게 했다.

 

작품을 감상하면서 몇 차례의 감정 변화를 겪었다. 처음에는 삐딱한 자세로 폭포수처럼 이야기를 쏟아내는 이 작품 앞에서 소외를 느끼고 묘한 짜증과 불편함을 느꼈다. 그리고 역시 관객이 듣는지 안 듣든지 상관없이 작품이 읊조린 몇 마디에 이상한 공감과 슬픔에 휩쓸렸다.

 

관객 입장에서 연극 '구미식'은 정말 짜증 나는 작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은 내내 끝없이 팝업창을 띄우고, 일반적인 서사와 등장인물에 대한 해석을 조롱하듯이 뒤틀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외부의 상징을 끌어온다. 작품은 내내 불쾌한 내용을 담은 팝업창과 모바일 똥겜같은 UI를 뒤편의 긴 직사각형 모니터에 띄운다. 하지만 이러한 연출이 작품의 서사와 맞물리지는 않는다.

 

'구미식'은 '행복한 왕자'와 '유리동물원'의 이야기, '유리동물원'의 작가의 아바타와 작가의 애인을 가져오지만, 각 작품의 핵심적인 내용을 가져오지 않고, 조롱조로 변형한다. 경상도 일부 지역의 박정희에 대한 비이성적인 맹신과 최근의 계엄령을 서사로 끌어오지만, 하나의 메시지로 통합되지 않고 앞서 멀티엔딩처럼 나열한다. 작중 역할이 모호한 배우가 중간에 끼어들어 나무위키나 페미위키에 '구미식'을 찾아보라 권하지만, 사실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구미식'의 진실은 해석의 열쇠가 되지 않는다.

 

이런 부산스러운 서사와 더불어 검은 비닐봉지로 쌓인 소극장과 관객의 시선을 따라오는 듯이 당당하게 배치된 변기는-내 연상을 적어 보자면- 편의점 비닐봉지에 생일 선물을 건네주는 이성 친구 같았다. 보통 그런 선물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하던가? 역시 뺨을 때려야 하나?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작품이 내민 것은 불성실함이나 경멸의 의미로 내민 조롱이 아니라, 관객인 내가 받아주길 원한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신경질적으로 비닐봉지를 풀어 열어본 그곳에, 선물을 준 이와 내 얼굴의 가장 비참한 부분이, 자신의 비굴하고 참담한 모습을 자각이라도 하는 것처럼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작품이 비닐봉지로 싸인 이유를 이해한다. 그가 가장 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그토록 부끄러운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배설해 오면서도 외면해 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출팀들도 이 작품을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비닐봉지에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이 관객들에게 주고 싶었던 것이 정말로 추하고 부끄러운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가 늘 똥통에 처박고 싸구려 봉지에 넣었던 것을, 이제 와서 아름다운 선물 상자에 넣는 것도 우습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한 번도 그것은 선물과 같은 지위를 가진 적이 없다. 하지만 '구미식'은 관객들에게 오랜 시간을 고뇌하여 상연된 '선물'로 제시된다. 선물에는 언제나 그 사람의 진지한 수용을 기대하는 마음이 내재하여 있다. 그래서 '구미식' 안에는 자조와 조롱, 오갈 데 없는 분노와 포기가 깊게 녹아들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행위 자체만으로 그 안에 담긴 메시지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싶은 마음이 깔려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그 부끄럽고, 배설해 온 것'은 무엇인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나는 '구미식'이 뚜렷한 메시지를 담기보다는, 현대사회에서 느끼는 혼란과 불쾌함을 거칠게 묶어 그대로를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작품의 목적은 '계도' 보다는 '체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실제로 서사적 연결성에 집착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작품을 돌아보면,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불쾌한 경험을 재치 있게 잘 녹여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팝업창에는 사람을 규정짓고 비교하는 메시지, 자본으로 욕망과 희망이 교환될 것이라는 환상, 남을 등쳐먹으려는 이기적인 속셈이 녹아들어 있다. 도시의 중앙에 서 있는 동상은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을 좀먹는 위선으로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시대착오적인 '구미식'에서 교사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입은 교사는 빨간 운동화를 신었지만, 그 사상이 발전되지 못하고 폭력적이고 억압적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톰을 마약에 취한 동성애자로 선정하고 주요한 화자로 배치했다는 점이다. 권위주의와 자본주의의 천박함이 섞인 '남성 영웅' 박정희가 가터벨트를 차고 동성애자인 주인공을 몰아세우고, 때로는 자신의 전령으로 사용하는 것은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왕자 박정희와 제비 톰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긴장감은 폭력적이고 성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연극이 계속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열어놓는다는 점에서, 톰이 취해있는 것도 마약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과다한 정보일 수도, 지적하는 것조차 포기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눈부심일 수도, 나약함을 숨기기 위해 집착하고 있는 환상일 수도 있다. 뭐가 되었건 말건 현대인은 그 동상에 강간당하고, 마약에 취해있으며, 화장실 끝자락 속에서야 자신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다.

 

'구미식'이 관객들에게 강제하는 불쾌함은, 연극의 불쾌한 의도에서 기원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연극은 단순히 화장실 끝 쪽에 숨어있는 우리의 현실을 생생하게 비춘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믿을 수 없는 사물, 정신을 분산시키는 패러디, 힘과 환상, 욕망에 굴복하는 나약한 인간, '구미식'은 이들을 그대로 비춤으로써 우리가 잊고 있었던 우리 사회에 대한 연민을 돌아보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이런 해석은 배우가 어린 시절의 작은 할머니 이야기를 꺼냈을 때 더욱 뚜렷해졌다. 온통 거짓말과 환상, 과장과 조롱으로 가득 차 있는 가상의 나라 '구미식'에서, 상대적으로 덤덤하고 현실적인 이 이야기가 진짜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것이 결국 '할머니'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한 혼란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한다. 배우는 작은할머니가 해준 이야기가 흥미로운 한편 일종의 정치적 폭압을 알게된 이야기, 할머니가 진짜 할머니가 아니었다는 기묘한 사실을 나열한다. 할머니에 대한 묘한 애정과 할머니의 이야기와 신상에 대한 혼란이 섞인 진술은, 작품이 내내 보여준 혼란과 엮여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할머니와 손자의 입장에서 무엇이 사실인지, 사실이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른이 되면 많은 것을 통합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할머니에 대한 배신감도 있지만, 할머니가 왜 그토록 종교적 믿음에 가깝게 박정희를 숭배했는지, 진짜 혈육이 아닌 할머니가 왜 나와 함께 살게 되었는지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할머니를 마냥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는 위치에서 혼란이 시작된다. 할머니가 그 바보같은 무리의 일원이라는 사실로 왜곡하여 받아들이면 편하겠지만, 비행기 창가에서 앉아 밖을 바라보는 할머니에게 느끼는 사랑을 무시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안이지 않은가.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혼란을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나는 그러한 혼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의 용기를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자주 발휘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모두 타고난 가장 탁월한 마음의 능력이다. 나는 이 작품을 아주 개인적인 결론으로 작품을 이해했지만, 결국 이런 부분에서부터 이러한 혼란을 '화장실 끝 쪽에서 처넣은 비닐봉지'에 버리지 않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연극 '구미식'은 그래서 참, 그토록 불쾌했으면서도 그 끝에서는 사랑스러운 면이 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이 작품의 이야기를 내던지는 대신 잘 정리하여 서랍에 보관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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