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작가의 그림과 혼자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면 할 것인가.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닐 듯하다. 나는 아직까지 그런 종류의 강렬한 만남을 만나지 못해서인지, 그저 어둠이 무섭기 때문인지.
블루 베이컨의 저자는 소설가인 야닉 에넬은 프랑스 퐁피두 미술 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 전시회에서 혼자 밤을 보내게 된다.
이 책은 단순한 미술 비평서가 아니라, 베이컨의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감각과 감정을 섬세하게 풀어낸 하나의 문학적 탐험이다. 에넬은 미술의 언어를 문학으로 번역하며, 때로는 철학적이고 때로는 시적인 문장들로 독자를 베이컨의 세계로 안내한다.
베이컨의 그림은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를 이해하기 시작한 에넬 역시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너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무엇이 네 존재를 이루는가.
베이컨의 그림에는 숨겨지지 않은 절망과 고함, 방황과 우울함이 산발적으로, 공격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한 번이라도 베이컨의 그림을 봤다면 그 그림들을 쉽게 잊을 순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고기'라며 뒤틀리고 해체된 신체를 그렸던 베이컨의 그림이 누군가의 트라우마를 건드릴 수 있다는 가정을 하는 것도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 두 가지가 연결되는 방식으로 에넬이 선택한 것도 고통이다.
기대와는 달리 에넬은 처음부터 고통과 마주하게 된다. 그의 고질병인 편두통은 그의 모든 신경이 두통에만 쏠리도록 했다. 간신히 간이침대로 향한 그가 진통제의 약효가 돌기 기다리는 순간까지 모든 것들은 그저 그의 고통과만 연계돼 있다. 그는 이 과정을 '파랑을 향해 간다'고 표현한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면 왜 에넬이 전시장에서 가장 처음으로 느낀 감정으로 '고통'을 선택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편두통 치료제인 트라마돌의 약효를 기다리는 동안 에넬은 자신이 유년기에 보냈던 방을 회상한다. 에넬은 어린 시절 방에서 느꼈던 공포감이 어떻게 유년시절의 경험들과 연결되는지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개인적인 경험을 들으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조금 더 베이컨과 가까워진다.
"존재 자체는 상처를 통해 경험한다. 그것이 비극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베이컨은 초기부터 자신의 존재를 부정 당했다. 일찌감치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깨달았던 그가 자신의 존재를 확인 받고자 했던 행동들은 교정해야 할 대상이었고 사회의 틀에 맞추지 못한 '잘못'을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이러한 그의 이야기들은 그림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한다.
베이컨의 그림은 그런 고통을 가장 날 것의 모습으로 표현한다. 뭉그러진 얼굴, 태초의 모습을 읽어낼 수 없는 뒤틀린 몸. 그림은 소리를 낼 수 없는데도 절규를 어렵지 않게 경험할 수 있다. 그 강렬한 감정들이 쌓인 그림들과 하루를 보내기로 하면서 에넬은 내면의 공포들과 직면하게 된다. 두통은 그것을 일찌감치 감지한 몸의 거부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그저 에넬이라는 필터를 통해 베이컨의 그림들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졌다. 책에는 베이컨의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베이컨의 그림을 모르며, 한순간에 에넬과 함께 퐁피두 센터에 남겨진 채로 혼돈스럽고 어지러운 베이컨의 그림에 대한 설명들을 읽어넘겨야 한다.
다만 어느 순간 우리는 알게 된다. 우리가 읽고 있는 에넬이라는 필터는 누구보다도 더 베이컨을 잘 이해할 수 있는 프리즘임을. 베이컨의 그림 앞에서 겪는 에넬의 감정은 곧 내 감정이 되어 하나의 푸른 물처럼 흐른다. 에넬은 그날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그날 밤 슬픔에 최대한 가까이 머물고 싶었고, 견딜 수 없는 것의 끝까지 가고 싶었다. 어쩌면 이것은 과장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때로 그것을 경험하며 그렇게 되면 그 외에는 아무것도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베이컨을 통해 오직 그의 그림이 요구하는 진실의 시련만을 만나는 것은 아닐까."
그림을 이해하는 것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감정에 몸을 맡기는 것이 가장 좋은 감상법일 수도 있음을 블루 베이컨은 조용히 일깨워준다. 고통을 받아들였을 때 만끽할 수 있는 파란 오아시스와 자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