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안 있으면 A 다시 프랑스 간다더라. 금요일 00시, 00에서 퇴근하고 시간 되는 사람 만나자.
- 갈게.
2025.02.28
"탈색했네?"
"오늘 하고 왔어."
"주문부터 하자."
"맥주 먼저 달라고 해."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와 처음 나눈 대화. 허례허식 없이 온전히 내가 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과의 저녁 식사 자리. 장장 15년을 이어져 온 친구관계.
"파리는 언제 가냐?"
"3월 중순쯤?"
"다시 올 때 연락해"
"예압."
"B는 언제 온대? C랑 D는 야근한다고 했고."
"몰라?"
마침 B에게 걸려온 전화.
- 콜키지 할 거니까 위스키 잔 3개만 부탁드려놔.
"네네- 오기나 하세요. 지각생분."
- 블루라벨 가져가.
"...더 천천히 오셔도 됩니다."
지각비로는 차고 넘치는 술과 함께, 시간이 되는 세 명이 모였다. 15년 전 서울시 소재 한 중학교의 2학년 -반에서부터 시작된 우리의 인연.
수업이 끝나고 청소를 도망가 동네 PC방에서 게임한 게 걸려서 혼났던 녀석들이다. 여름에 물풍선 한 박스를 사서 온 교실을 물바다로 만들었던 녀석들이다. 호기롭게 자전거로 한강을 달리다 천호대교 어드메에서 기진맥진해 터덜터덜 돌아온 녀석들임과 동시에 내 인생의 한 축을 단단히 떠받들고 있는 녀석들.
시작점으로부터 많은 분기점을 지난 우리는,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 다른 궤적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번 여름엔 안 들아와?"
"아마 시드니에서 휴가 보낼 것 같은데. 그래도 하루 이틀 시간 뺄 테니 볼 수 있으면 한국에서 보자. 와인 좋은 거 사 올게."
"전에 청평 어디쯤에서 양고기 토마호크? 괜찮게 하는 곳 찾았었는데. 내가 공수해 온다."
"말들은 그렇게 해도 계획이란 걸 짤 리가 없으니, 내가 짜는 계획대로 진행해."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번엔 이 게임을 하자'느니, '오늘은 마시고 죽자'느니 하던 친구들과 조금은 다른 결의 대화가 그것도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사실 대화가 물 흐르듯 이어지는 것도 참 신기한 조합이다.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녀석들을 포함해도)
사진이 좋아 무작정 지방에 내려가 돈을 벌어 DSLR을 산 뒤, 제주도로 건너가 스냅사진을 시도하고 종국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사진작가로 일하고 있는 A.
자전거, 테니스, 등산, 볼링을 좋아하고 흡연, 음주를 기피하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재미없는(?) 삶을 살고 있는 B.
글이 좋아 관련업계에 몸담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나.
"작년에 기억나냐? 속초 여행."
"아아. 컨셉은 만취. 굉장히 기억에 남고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좋았죠?"
"그거 생각난다. A 아침부터 속 안 좋아서,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락날락했는지."
"조용히 해."
서로 다른 삶을 살다 쉼표 하나 찍듯 만나는 우리의 관계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나브로 하나씩 변해있고 변해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과거를 들추며 추억을 곱씹는 행위는 어쩌면, 이 집단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한 어떤 종류의 노력이 아닐까.
"요즘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것 같아."
"누가 그러던데. 20대는 20km/h, 30대는 30km/h, 40대는 40km/h로 시간이 흐른다고."
"뇌라는 게 반복자극은 휴지통에 버리는 것처럼 없앤다고도 하더라. 새로운 자극이 넘쳐나는 10대는 기억할 것도 많고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지만, 요즘 우리 하루하루가 그렇게 신나진 않고 반복되니 삭제되는 거 아닐까?"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야. 그러면 반대로 하루하루의 새로운 자극을 찾아야겠어."
"우선, 너는 술부터 줄일까?"
"조용히 해."
삶 따라 나이 따라, 만나는 집단 구성원은 변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몇몇 그룹이 있다.
각자의 삶이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빠르게 흘러가든. 결국 우리는 지금처럼 다시 쉼표를 찍으러 오겠지.
나이는 평등하게 먹으니, 그때가 돌아오면 각자의 삶을 다시 공유하고, 추억을 반추하며, 미래를 이야기하겠지.
"또 언제 보지?"
"또 보겠지."
다시 만나 이야기하는 그날, 우리는 각자가 경험한 새로운 삶을 공유하고, 나누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