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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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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함경북도 신아산에서 안중근이 이끄는 독립군들과 일본군이 전투를 벌이게 된다. 결과는 독립군들의 승리였다. 하지만 숨을 돌릴 새도 없이 문제가 발생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이 만국공법에 따라 전쟁포로인 일본인들을 풀어준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독립군 사이에서는 안중근에 대한 의심과 함께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1년 후,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와의 협상을 위해 하얼빈으로 향한다는 소식이 돌게 된다. 그러자 안중근을 비롯해 우덕순, 김상현, 공부인, 최재형, 이창섭 등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이들이 망설임 없이 모였다. 그런데 독립군들을 방해하는 것은 살갗을 긁는 추위뿐만이 아니었다. 내부에서 새어 나간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들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피와 땀을 나눈 동료를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독립군들의 걸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허기나 피로와 같은 육체의 고통을 넘어서 정신적으로도 한계에 다다랐지만 숙명을 받아들이듯 정진했다. 그렇게 도착한 하얼빈에서 안중근은 러시아어를 외친다.


 

корея ура! (꼬레아 우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대한의군 참모중장이 일본 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며 내지른 외침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그날의 총성


 

대한민국 정규교육을 마쳤으면서 안중근을 모르면 외계인이다. 북한 간첩도 안중근 의사는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 사살한 사건 역시 이미 전 국민이 알고 있다.

 

이처럼 유명한 독립운동가인 만큼, 안중근 의사가 나오는 컨텐츠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1946년에 「의사 안중근」이 개봉했고, 1959년에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이 나왔으며, 1972년에 드라마 「의사 안중근」이 방영됐다. 1979년에는 북한에서 안중근 의사 탄생 100주년을 기여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를 제작하기도 했다. 또한, 2022년에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년을 다룬 동명의 뮤지컬을 기반으로 한 영화 「영웅」이 개봉했었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안중근은 '영웅'이다. 특히 최근에 개봉했던 「영웅」에서는 안중근이 겪었을 감정을 극적인 연출로 표현하였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항일 무장투쟁을 했던 위인으로 그려내며 사람들의 존경심을 이끌어냈다. 지금까지 많은 영화에서 그렇게 해 왔다.

 

사실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 항일 영화에서 신파 작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순국선열을 영원히 기억하려는 후손들의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래로 이어질 내용에서는 개인적으로 느꼈던 신선함과 감동에 대해 다루는 것이라고 확실히 하고 싶다. '나머지는 죄다 틀렸고 「하얼빈」만이 오로지 정답이다'라기보다는 새로운 지평을 연 우민호 감독과 배우들, 그리고 제작진들에 대한 존경이다.

 

 

 

안중근 의사를 비추는 새로운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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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초반부터 감독의 고집이 굉장하다고 느껴졌다. 물론 긍정적인 의미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투가 벌어지는데, 순간적으로 '언제 끝나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길고 루즈하다. 이것은 의미 있는 영화를 보며 오락성만을 추구하는 도파민 중독자의 감상이 아니라 적잖은 사람들이 후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관객들이 비슷한 감상을 느낀 것은 우연이나 감독의 실수가 아니다.

 

다른 영화 같았으면 화려한 액션을 통해 쾌감을 줬을 장면이었지만 우민호 감독은 달랐다. 무술 감독이 짜온 전투 장면을 전부 거절하며 오락적 요소를 철저히 배제했다. 그저 사람들이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의 모습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담아냈다. 사실 감독 본인은 블록버스터 오락 영화를 좋아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러한 태도는 스토리의 절정 부분에서도 일관적이었는데,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모습을 항공 촬영을 통해 담아냈다. 화려한 장면 전환이나 배우의 연기를 내세우지 않고 그저 하얼빈역의 상황을 전체적으로 보여줬다. 러닝타임 내내 건조하고 정적인 흐름을 유지했다.

 

그래서였을까. 영화를 보며 내내 공백이 느껴졌다. 어딘가 텅 비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떻게 보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하얼빈」은 300억이나 되는 거대자본을 투입한 영화다. 홍경표 촬영감독이 수준 높은 실력으로 영화의 영상미를 책임졌다. 얼어붙고 금이 간 두만강과 몽골의 건조한 사막은 관객을 압도했다. 게다가 조영욱 음악감독과 이명로 작곡가가 협업하여 영화의 톤과 어울리는 웅장하고 묵직한 음향을 설계했다. 여기에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오리지널 스코어가 완성되기도 했다. 「하얼빈」은 무조건 IMAX로 봐야 한다는 후기가 나왔던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상영시간 내내 동행하는 여백의 미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호기심은 상영관을 나오면서 풀렸다.

 

 

 

"안중근 내면의 고뇌가 너무 빠졌어!"



옆자리에서 감상했던 친구가 상영관을 나오며 중얼거렸다. 안중근과 어머니의 관계를 넣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실제로 미공개 장면 중에서 상현(조우진)이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는 내용이 있다는 것은 후에야 알았다. 확실히, 해당 장면을 넣었다면 인물에게 쉽게 공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왜 미공개로 남은 것인지 알 것도 같았다.

 

친구와 대화를 하며 깨달았다. 애초에 감독은 '감정'을 고의적으로 배제시켰던 것이다.

 

전부 등장인물의 감정이 빠져서 생긴 공간이었다. 신아산에서의 전투나 하얼빈에서의 저격이 정적이었던 것은 '감정의 절제'를 위해서였다. 그렇게 고의적으로 탄생한 빈 공간에는 역설적으로 관객들의 감정이 들어차게 된다. 그것이 바로 「하얼빈」의 의도이자 핵심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어려운 길을 택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소위 말하는 신파를 이곳저곳에 배치하면 관객은 순식간에 이입하게 되고, 대단한 노력 없이도 등장인물에게 공감할 수 있다. 러닝타임 내내 이정표를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감독이 선두에 서서 출발하는 패키지여행이다. 관객 모두가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며 추억을 쌓는다.

 

하지만 「하얼빈」 같은 경우에는 혼자서 하는 자유여행이다. 감독은 관객을 눈 내리는 두만강으로 던져 놓는다. 비싼 티켓값이 아깝지 않도록 제대로 즐기려면 극에 적극적으로 몰입해야 한다.

 

 

 

공백을 채우는 것은 관객의 몫


 

영화를 보며 공백이 신경 쓰였던 것은, 주도적으로 공감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등장인물이 표현해줬어야 했을 감정의 흔적만을 찾고 있으니 피치 못 하게 폭발해야 하는 장면이 아니고서야 허전함이 느껴졌다. 그것이 채워지기 시작한 것은 집으로 돌아가면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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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폰을 끼고 영화의 OST를 들으며 소음을 차단했다. 그렇게 세상에 혼자 남으니 오히려 등장인물에게 더욱 이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처한 상황을 되새겨 보았고, 인터넷 서핑을 통해서 시대 상황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기도 했고, 같은 상황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상반된 이념을 가진 이유에 대해서 사유해 보기도 했다. 그로써 영화가 제대로 마무리되는 느낌이었다.

 

결국은 공백을 채우는 것이 관객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닌, 철저하게 의도적인 공백일 경우의 얘기다.

 

「하얼빈」은 그런 의미에서 신선한 영화였다. 이미 알려진 바가 많기에 영화 시작도 전에 관객들이 공감하며 들어오는 '안중근'이라는 인물을 이렇게나 건조하게 표현했다는 점이 그렇다. 또한, 기존 작품들이 묘사하는 안중근의 공식을 전부 버리고 정적인 방식을 선택하면서도 지루함은 덜어낸 영화였다. 첩보 장르 특유의 긴장감을 이용하여 흥미를 이어 나갔고, 가상의 인물을 창조하면서도 역사적으로 중심을 잡으며 논란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삼일절이 포함된 3월, 조국의 광복을 기념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하얼빈'을 보기를 바란다. 비워둠으로써 오히려 더욱 풍부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영화다. 게다가 '풍부해지는 것'이 바로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상황과 내면에 대한 이해」이니 쉽게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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