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2K. 요즘 다시 유행하는 복고풍 패션을 설명하는 수식어로 자주 사용되는 이 말이 실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2000년대를 인식하지 못해 통신이 마비될 거라는 세기말 소문을 뜻하는 용어라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됐다.
2002년에 태어나 연도의 맨 앞자리 숫자가 2로 시작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내게 세기말의 혼란과 새천년의 불안은 여전히 너무나도 멀고 희미하기만 하다. 마찬가지로 전 세계인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던 노스트라다무스의 1999년 지구멸망설도 내겐 흐릿한 안개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옛이야기 같다.
그럼에도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그 시절을 적어도 가늠이라도 해볼 수 있는 것은 분명 시대를 담아내는 영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두 달 전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재개봉한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2001년 작 〈밀레니엄 맘보〉가 그 대표적인 예다.
완성된 시나리오 없이 고작 두 장짜리 시놉시스에 의지해 만들어진 이 영화에는 사실 대단한 플롯이랄 게 없다.
주인공 비키는 자기에게 집착하는 남자친구 하오하오와 한집에서 살고 있고, 집세를 내기 위해 호스티스로 일하면서 손님으로 만난 잭의 도움으로 그와 헤어진다. 하지만 평화로운 시간도 잠시, 잭은 조직에서 일어난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가 홀연히 사라지고 결국 비키는 다시 혼자 남는다. 그게 전부다.
그러나 비키가 그런 불안한 시작에 대한 한 세대의 정서와 경험을 의인화한 존재라고 생각하면 영화의 의미는 더욱 깊어진다. 하오하오와 헤어진 후 새로운 애인 잭과 함께하는 비키의 모습은 힘겨웠던 20세기 다음엔 분명 더 나은 21세기가 올 거라는 사람들의 기대를 은유한다.
하지만 안식처가 되어 주었던 잭이 결국 비키의 곁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는 결말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순진한 희망이 금방 불안과 두려움으로 뒤바뀌고 말았던 당시의 혼란을 담아낸다. 이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단연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다.
“세계는 2001년을 맞이했고 새로운 밀레니엄을 축하했다.”
화려한 무늬가 그려진 옷을 입은 비키가 푸른 빛이 감도는 공허한 터널을 걷는다. 가벼운 발걸음에 머리카락은 휘날리고, 걸음걸이는 당차고도 위태롭다. 해방감을 만끽하는 듯 무척이나 자유로워 보이는 비키는 어째서인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결국 영화는 계단을 걸어 내려가며 하강하는 그의 뒷모습을 비춘다. 새로운 세계를 맞이한 청춘들의 복잡한 감정을 밀도 있게 압축하여 보여주는 〈밀레니엄 맘보〉의 오프닝은 최고라는 말도 전혀 아깝지 않다.
그래도 허우 샤오시엔은 일말의 빛 한 줄기를 남겨둔다. 홋카이도 유바리에서 일본인 형제와 함께 새하얀 눈밭을 구르는 비키의 순수하고 행복한 모습은 미래가 생각만큼 어둡지만은 않을 거라고 얘기해주는 듯하다. 극 중에서 2001년이 현시점이 아니라 그로부터 10년 후의 비키가 회상하는 지난 시절로 등장하는 것도 어쩌면 혼란에 빠져 있던 비키에게 따스한 볕이 드는 양지와 같은 삶을 주고 싶었던 감독의 따스한 마음에 의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밀레니엄 맘보〉는 말과 글의 힘을 빌리는 영화가 아니다. 완벽하게 짜인 이야기와 멋진 미사여구를 자랑하는 영화도 아니다. 대신 감각적인 표현과 느슨한 은유로 영화를 느낄 준비가 되어 있는 관객에게 말을 건다.
이것이 바로 허우 샤오시엔이 〈밀레니엄 맘보〉를 통해 시대를 담아내는 방법이다. 겨우 몇 마디 문장으로는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기대와 불안을 표현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을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거라는 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