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에세이로 분류되지만 사실 장르가 애매하다. 소설처럼 줄거리가 있고 또한 과학과 심리학을 넘나드는 구성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여성 과학 저술가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겁이 많고 우울함을 자주 느꼈다. 곱슬머리 남자를 만나 사랑하게 되지만 3년만에 헤어지고 만다. 그녀는 충격을 받고 자신을 지탱해 줄 만한 것을 찾아 나서는데, 바로 그것이 ‘데이비드 스타 조던’ 이라는 과학자 겸 교수였다. 그는 긍정의 화신이었고 굽히지 않는 끈기를 가졌다. 따라서 그녀는 그를 멘토로 삼아 우울증을 이겨내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알고 보니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세상의 파멸자였다. 긍정적 자기 확신이 과하게 되면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분류하게 되고 장애인을 그리고 더 나아가 동물과 자연을 차별하게 되며 자기를 막는 모든 것을 파괴한다. 그녀는 깨닫게 된다. 무조건적인 낙천성, 자기 확신이 방패가 되어줄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은 오히려 방패가 아니라 칼이 되어 타인을 겨누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면서 또한 저자는 자신의 성 정체성도 인정하게 되고, 사랑하는 한 여성을 만나 혼돈을 거부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 이 에세이의 전체적인 줄거리다.
우리는 흔히 혼돈을 극복의 대상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혼돈이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 아닌 껴안아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특히 그녀는 인생에서 좌절을 경험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능력을 부러워하고 닮고자 한다. 이러한 능력은 긍정적인 마음에서 흔히 얻어진다. 여기서 ‘그릿’ 이라는 단어가 쓰이는데, ‘그릿’ 이란 좌절을 겪은 뒤에도 계속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다. 즉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증거가 전혀 없는데도 계속 해나갈 수 있는 능력이다. “다 잘될거야!” 라는 믿음과 끈기 즉, ‘그릿’ 이 우리를 계속 전진하게 도와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 착각은 일시적으로만 도움이 될 뿐이라고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하고 있다. 자기확신이 너무 강하게 되면 어떤 방해물에도 끄덕하지 않고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밀어붙여 가끔은 파괴적인 결과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긍정적 착각을 내버려 둘 경우 그 착각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공격할 수 있는 사악한 힘으로 변질될 수 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한 여자를 독살하게 된다. 그리고 또한 우생학을 밀어붙여 미국 내 수많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낙태 불임 시술을 권장하게 된다. 이러한 급반전의 전개는 에세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놀랍고도 인상적인 지점 중 하나다.
이 책의 제목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국, ‘인간을 비롯한 자연에서 명백히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은 없고, 그들 사이에서 우열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로 해석할 수 있다. 애초에 계층의 우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우열은 인간의 오만이기 때문이다. 계층의 충돌은 우리 상상의 산물이며 진리보다는 편리함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인간과 물고기 사이에 다양한 선을 긋는다. 그런 다음 우열을 만든다. 우리 생각에는 인간들은 우열의 피라미드 맨 꼭대기 위에 위풍당당하게 위치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편리하게 그어 놓은 그리고 과학이 증명해 보인 그런 편리한 선과 우열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모든 생물에는 인간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과 신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연을 어떻게 바라보면 좋을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민들레 법칙’을 소개한다. 민들레는 누군가에게는 약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소원을 비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라도 약초 채집가에겐 약재이고 화가에겐 염료이며 아이들에게는 소원을 비는 존재다. 모든 것은 소중하고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의 선을 그어버리는 순간 그 선의 한계 내에서만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선 안에 있는 것만 소중하고 선 밖에 있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게 된다.
마지막에 작가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인정하고 나서 행복하게 사는 장면이 그려지는데, 결국 혼돈과 우울은 자신이 그어 놓은 선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부분이었다. ‘사랑은 여자와 남자가 만나 이루어지는 것’ 이라는 사회적 통념에 몸소 부딪쳐 혼돈에 빠졌던 주인공이 그 동안 자신을 괴롭게 했던 것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자연의 진리에 그어 놓았던 선 하나였음을 깨닫는다. 남자가 남자를 또는 여자가 여자를 왜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굳어졌을까? 이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사람은 결코 홀로 설 수 없다. 자신의 이익이 최우선인 자연 상태에선 모두가 적일 수밖에 없고 모두의 화합을 도모하는 국가가 형성되어야 인간은 비로소 안정되고 행복한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따라서 행복한 상태를 얻기 위해선 국가 수립이 중요한데 국가의 필수 요소로 보이는 사람은 여성과 남성이 만나야 탄생한다. 따라서 국가는 자연스럽게 인간의 평화를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 여자와 남자의 사랑을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그려왔고 이러한 생각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결과 이성간의 사랑이 아닌 것은 모두 불순하고 이상한 것이라는 편견을 사람들에게 은연 중 심어온 것은 아닐까. 그러나 국가주의적인 입장이 아니라 개인주의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성간의 사랑이든 동성간의 사랑이든 그 이상의 초월적 사랑이든 모두 그들의 권리에 맞는 동일한 사랑임에 틀림없다. 이 책의 주인공 역시 여성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 또한 사람들이 흔히 ‘정상적인 사랑’ 이라 부르는 것과 다름없음을 알게 되고, 자신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여 비로소 행복을 누리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이렇듯 종종 성장한다는 것은 타인과 사회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법을 배움으로써 얻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