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막연하게 꿈꿨던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지도 벌써 1년이 넘었다. 1년 남짓한 호주 생활 중 약 7개월을 머물렀던 멜번은 이후 방문하고 머물렀던 많은 도시들을 포함해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다.
워홀의 첫 정착지로 멜번을 선택한 것에 큰 이유는 없었다. 평생을 서울에 살았기에 대도시인 시드니는 가고 싶지 않았고, 너무 외곽으로 가자니 잘 적응할 자신이 없었다. 적당히 큰 도시이면서 바다가 멀지 않고, 커피로 유명해 일자리가 많은 곳(카페에서 일하고 싶었기에)을 꼽으니 멜번이었을 뿐이다. 큰 로망 없이 간 멜번의 풍경과 문화는 그 자체로 완벽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기에 직접 살아본 사람으로서 내가 사랑하는 도시인 멜번의 매력을 조금이나마 소개해 보고자 한다.
걷다 보면 나타나는 공원
멜번은 호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지만, 도심지는 그리 크지 않다. 무료로 탈 수 있는 시티 서클 트램은 ㅁ자 모양으로 도심을 도는데, 시간을 재본 적은 없으나 약 30분 정도면 한 바퀴를 돌 수 있다. 이처럼 멜번은 다른 도시들과 비교하면 작은 편임에도 도시 곳곳에서 공원을 만날 수 있다. 재밌는 점은 벤치에 앉거나 돗자리를 펴고 휴식하는 우리나라의 공원의 모습과 달리, 대부분 맨몸으로 잔디밭에 누워 낮잠을 자거나 햇볕을 쬔다는 점이다. 도시를 돌아다니다 지칠 때, 공원에 들어가 냅다 누워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 호주 공원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다.
그중 도심 바로 옆에 있는 ‘칼튼 공원’은 멜번 전체를 통틀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다. 당시 살았던 집에서 매우 가까워 이른 퇴근 후 집에 가기 싫을 때, 혹은 약속이 없는 휴일이면 돗자리 하나를 챙겨 칼튼 공원으로 향하곤 했다.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산들바람을 맞으며 낮잠을 자던 순간은 지금까지도 가장 그리운 호주에서의 일상이다.
또 칼튼 공원은 멜번의 공원 중에서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곳이기도 하다. 성처럼 생긴 하얗고 예쁜 건물 때문인지, 주말에 가면 종종 결혼식을 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와 달리 호주에서는 공원에서 결혼식을 하는 게 흔한 풍경이기 때문이다.
도심과 자연의 조화
멜번의 가장 큰 매력은 도심과 자연의 조화가 아닐까 싶다. 계획도시이기에 가능한 직사각형의 큼직한 도로와 그 사이를 달리는 트램은 매우 편리한 대중교통이며, 호주 내 문화와 예술의 중심으로서 다양한 축제와 행사를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조금만 외곽으로 나가면 아름답고 한적한 동네가 나온다. 단독주택과 나무들, 이국적인 건축물들이 나열된 아기자기한 동네를 걷다 보면 저절로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단지 중심부에서 1~2키로미터 떨어졌을 뿐인데 5층 이상의 건축물을 찾기 어렵다는 게 무척 신기했다. 또 트램을 타고 남쪽으로 30분 정도만 가면 세인트 킬다 비치가 나온다. 시드니나 골드코스트의 새파란 바다의 아름다움에는 못 미치지만, 여름날 해수욕을 즐기기엔 충분한 곳이다.
부드러운 라떼의 매력
나는 커피를 즐겨 마시는 편은 아니다. 쓴 것을 싫어해 아메리카노는 입에도 대지 않고, 카페에서는 주로 아이스 바닐라 라떼나 에이드 종류를 주문하곤 한다. 그런 내게 커피의 매력을 알려준 것이 멜번의 커피다. 커피로 유명한 호주에서도 멜번은 특히나 커피로 유명한 도시다. 모든 카페에는 오트, 아몬드, 소이 등 다양한 종류의 우유가 존재하며,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커피를 즐긴다. 아메리카노와 라떼로 구분되는 우리나라 커피와 달리 플랫 화이트, 소이 라떼, 오트 카푸치노 등 각자의 스타일로 커스텀해 주문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호주 카페는 대부분 좋은 원두를 공수해 사용한다. 세계 1등 바리스타가 만든 커피도 좋은 원두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커피 맛에서 원두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시럽을 넣지 않아도 커피의 쓴맛이 훨씬 덜해서, 쓴 걸 싫어하는 나도 호주에 사는 동안은 1일 1라떼를 즐기곤 했다. 전보다는 커피에 관심을 갖게 된 지금도 여전히 아메리카노는 마시지 못해서, 출근 후 책상에 앉을 때면 호주의 라떼가 절실하게 생각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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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번은 영국의 한 기관에서 선정한 <살기 좋은 도시>에서 몇번이나 1위를 기록한 도시이기도 하며, 직접 살아본 나 역시 이 순위에 적극 동의한다. 비록 순위권에 든 다른 도시들 대부분은 가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조금 다르게 말하면 멜번은 ‘살고 싶은 도시’이지, ‘관광하기 좋은 도시’는 아니라고도 말하고 싶다. 시드니처럼 유명한 관광명소가 많지도 않고, 퍼스나 케언즈처럼 광활한 자연이 펼쳐져 있지도 않다. 또 날씨가 제멋대로라 갑자기 비가 오거나 쌀쌀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멜번의 풍경과 문화는 내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편리한 인프라와 아름다운 풍경에서 오는 여유는 하루를 기분 좋게 만들어주며, 다양한 인종들이 어울려 있기에 치안도 좋은 편이다. 먼 거리와 바쁜 생활로 인해 쉽게 갈 수 없는 도시라는 점이 아쉽다. 멜번의 아름다운 거리와 친절한 사람들이 그리워질 때쯤 너무 늦지 않게 다시 찾아가고 싶다. 그 시절 느꼈던 여유와 마음가짐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