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이해하는 데는 실로 엄청난 노력과 관심이 수반된다. 우리는 나와 다른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의 상황을 유추하고 공감할 수는 있다. 원한다면 나의 감정 상태를 상대방에게 맞추도록 스스로 변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연극 <타인의 삶> 속 비즐러는 크리스타와 드라이만의 삶을 엿들은 후 자신의 가치관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 이 작품은 동독과 서독으로 분리된, 온갖 이념들과 억압, 검열이 행해지는 사회구조 속에서 한 인간이 변화하고 잃어버린 주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았다.
작품은 주인공인 비즐러가 동독의 국가보위부 슈티지 요원으로서 극작가인 드라이만과 그의 연인인 크리스타를 감시하며 발생하는 일련의 사건을 보여준다. 내가 이 연극을 관람하며 비즐러만큼이나 눈여겨봤던 인물이 바로 크리스타다. 극 중에서 비즐러에게 감시를 당하던 크리스타는 딱 한 번, 펍 공간에서 비즐러와 실제로 마주한다. 이때 비즐러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들은 크리스타는 이후 국가보위부의 한 취조실 안에서 다시 한 번 비즐러를 만나게 된다. 가장 힘들 때 자신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준 이를 취조실에서, 그것도 조사받는 입장으로 다시 만났다는 사실은 그녀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연극을 관람하며 크리스타를 이해하는 이는 결국 존재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연기를 하지 못하는 배우는 죽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하며 드라이만의 타자기가 숨겨져 있는 위치까지 전부 불고 만다. 하지만 동독 감시원들이 드라이만과 그녀의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비즐러가 그의 타자기를 가져간 후였다. 이 사실을 알 리가 없었던 크리스타는 결국 죄책감에 못 이겨 집에서 뛰쳐나갔다가 차 사고로 인해 급작스럽게 목숨을 잃게 된다. 나는 크리스타가 만약 그때 목숨을 건졌다고 할지라도 다시는 무대에 서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다. 크리스타의 육체와 상관없이 그녀는 이미 정신적인 죽음을 맞이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자기를 온전히 이해해 주는 사람이 세상에 단 한 사람만 있어도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될 수 없지 않을까?“
드라이만이 처음 예르스카와 같이 작업할 때 예르스카는 며칠 동안 그를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 예르스카는 뜬금없이 그를 위한 피아노 연주를 들려줬고 그 연주를 들은 드라이만은 예르스카가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 줬다고 생각하고 눈물을 흘린다. 예르스카로부터 처음으로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행위에 대해 알게 된 드라이만은 결국 그의 죽음을 막지 못한 채 참회의 피아노 연주를 한다.
개인적으로 감탄이 나올 만큼 인상 깊었던 부분은 바로 드라이만이 자신의 집에 숨겨져 있었던 도청 장치를 발견하는 장면이었다. 무결점의 흰 바닥, 천장에서 길고 까만 도청 장치 줄이 떨어지는 연출은 보는 내가 다 숨이 막힐 정도로 엄청난 압도감을 선사했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길게 늘어진 줄은 결국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힘없이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진다. 그 줄들은 서로 어지럽게 얽혀 한데 뭉쳐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왠지 모를 역겨움을 느꼈고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토악질까지 나올 수준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관람한 영화 원작 연극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완성도를 갖춘 작품이라고 느껴졌다. 영화를 관람할 때도 캐릭터들의 직업이 극작가, 연극 배우, 연극 연출이라 연극화했을 때 더 몰입하기 쉬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직접 무대 위에 올려진 모습을 보니 상상 이상으로 더 완벽해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특히 장벽 너머의 사람들에게 고하는 연설 장면 속 드라이만의 모습은 마치 제 4의 벽 너머 관객에게 하는 말처럼 들릴 정도였다.
"혁명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비즐러의 상상 속 드라이만이 쓴 희곡에서는 가만히 지켜보는 것을 넘어 모두가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드라이만은 자신을 이해해 준 예르스카를 지켜보기만 했을 뿐 적극적으로 나서서 행동하지 못했다. 그와는 반대로 비즐러는 드라이만을 이해하고 직접 나서서 그를 위험에서 꺼내주기까지 한다. 하지만 드라이만은 비즐러가 자신을 감시 체재로부터 구해준 존재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도 그에게 고마움을 전하러 절대 먼저 다가가지 않는다. 그때도 드라이만은 그저 멀리서 비즐러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진실을 깨닫게 된 드라이만은 예전에 예르스카를 떠나보냈던 것처럼, 그저 무력하게 비즐러는 지켜보기만 한 게 아니다. 이제 그는 비즐러와 본인이 동등한 위치에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즐러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이 그에게 폭력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드라이만은 고통스럽게 만든다. 드라이만이 택시를 타고 비즐러를 앞서가는 순간, 차창 너머로 비치는 비즐러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닿을 것처럼 가깝게 느껴지다가도 이내 아득히 멀어지고 만다.
비즐러가 드라이만을 구하기 위해 거짓으로 지어낸 말은 어느새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절정 장면에서 비즐러는 자신이 작성한 레닌의 일대기를 다룬 연극 대본을 직접 연기한다. 이 대본은 지금까지 사회주의와 동독 정부에 충성해 오며 예술을 접해본 적도 없는 비즐러가 작성했다는 점, 그간 자신이 구성원들에게 저지른 폭력과 비인간적인 행동을 반성한다는 걸 간접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연극 <타인의 삶>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그 관계의 적정 거리에 관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한 사람이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폭력적인지 영화는 당시 분리된 독일의 상황에 빗대어 보여준다. 금방이라도 잠식당할 것 같이 깊으면서도 건조한 인물들의 감정선을 담담하게 그려낸 훌륭한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