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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여기, 성스러운 재판장에 다리를 꼬고 앉은 한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마타 하리(MATA HARI). 아니, 이제 막 그녀의 본명이 드러나는 참이다. 마가레타 젤르. 훗날 유럽을 뒤흔든 댄서이자 세계 1차 대전 당시 프랑스와 독일의 이중 스파이로 활동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뮤지컬 <마타 하리>는 화려하고도 위험한 스파이 마타 하리의 개인적 삶에 주목한다. 2016년 초연을 올린 이래로 마침내 가장 완벽해진 서사와 무대를 선보이는 마타 하리. 다른 뮤지컬이 아닌 왜 ‘마타 하리’여야 할까. 마치 물랑루즈를 연상케 하는 정열적이고 화려한 무대와 더불어, ‘마타 하리’라는 인물이 주는 서사적인 울림에 주목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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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와 파괴


 

1910년 5월 6일 오늘, 에드워드 7세가 서거했습니다.

1914년 7월 5일 오늘, 독일이 참전을 발표했습니다.

1916년 4월 21일 오늘, 프랑스가 베르됭 전투에서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1900년대 초, 세계는 급변하기 시작한다. 라디오는 발 빠르게 그 소식을 전하고, 하늘 위로 총알과 포탄이 쏟아진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불타는 대지 위에서 춤을 춘다. 전쟁의 한가운데, 마타 하리는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녀를 감싼 베일이 한 꺼풀씩 벗겨지며 살결이 드러나고, 관객들은 그 이국적이고 자극적인 자태에 숨을 죽인다. ‘엄두도 못 낼 의상을 입을 용기, 살다 살다 이런 걸 보게 되다니!’ 전쟁으로 침울해진 사회 속 마타 하리는 신선한 충격을 선사하며 단숨에 유럽 사회에서 스타로 자리 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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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마타 하리의 탄생을 알리는 <사원의 춤>은 뮤지컬 <마타 하리>의 하이라이트다. 손끝을 모으고 손목을 천천히 돌리는 매혹적인 손짓은 그 시대의 마타 하리의 공연을 실제로 보는 것처럼 빨려 들어가게 된다. 무용수들의 옷에 달린 비즈가 흔들리는 소리마저 마이크를 타고 생동감 있게 전해진다.

 

그러나 그녀의 탄생이 처음부터 아름답고 화려한 것만은 아니었다. 마타 하리. 인도네시아어로 ‘태양’을 뜻하는 그 이름 이전엔, 마가레타라는 이름이 있었다.

 

온 세상이 자신의 것만 같았던 어린 마가레타는 아버지의 사업이 파산한 이후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교장은 학비를 내주는 대신 성상납을 요구했고, 어느 군인이 신문에 장난으로 실은 구혼 기사에 속아 그의 아이를 가지게 된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아이마저 독살당하자, 마가레타는 혈혈단신으로 프랑스 파리로 향하게 된다.

 

그곳에서 만난 재봉사 ‘안나’는 그녀의 춤을 알아본다. 그 춤은 아이를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던 마가레타를 위해 자바 여인들이 치른 의식이자 그녀의 구원이었다. 살기 위해 다시 한번 그 춤을 꺼내든 마가레타는 문득 자바여인들이 지어준 이름을 떠올린다. 새로운 태양, 새로운 눈MATA HARI. 그들은 파괴가 존재해야 창조가 있는 법이라 말했다.

 

마타 하리는 파괴를 딛고 일어서기로 한다. 겉보기엔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닮은 마타 하리는, 사실 덩굴처럼 마가레타의 균열 사이로 돋아난 강인한 생명력의 산물이었다. 모진 운명에 휩쓸리던 마가레타는 베일 속에 싸인 채, 고귀하고 신비로운 마타 하리의 인생을 살게 된다.

 

 

 

사랑과 전쟁


 

전쟁이 고조될 수록 마타 하리의 춤은 점점 더 처절해진다. 지키고 싶은 것이 생겼기 때문이다.

 

프랑스 공군의 소위 아르망 질로는 마타 하리의 완벽한 연인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본 듯 첫만남부터 사랑의 징조가 싹튼다. 이미 모든 이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마타 하리에게 아르망은 묻는다. ‘이름은?’ 마타 하리는 잠시 황당해한다. 어떻게 나를 모를 수 있을까! 그랬던 마타 하리도 잠시. 그녀가 건넨 답은, 마타 하리가 아닌 ‘마가레타’였다.

 

아르망과 연인 사이로 발전한 마타 하리는 점점 그를 속이는 것 같아 두려워진다. 결국 마타 하리는 이미 자신이 버려질 것을 상정한 채 아르망에게 힘겹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그러나 아르망은 베일 너머 마가레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르망은 이미 마타 하리를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마가레타로 받아들인 이유는, ‘당신은 내가 마가레타를 만나길 바랬으니까.’ 그것은 마타 하리와 마가레타 사이의 불화를 잠재우는 말이자, 그녀가 사랑의 힘을 믿게 된 결정적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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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그 소녀>는 여태 능숙하게 남성들을 유혹하던 팜므파탈의 마타 하리가 사랑 앞에 설레는 순수한 소녀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2층 발코니에서 서로 키스를 주고 받는 그들의 모습은 영락 없이 사랑에 빠진 연인이다. 마타 하리는 그가 선물한 발레리나 오르골에 감격하며 아르망의 비행이 무사히 끝나길 기도한다. 무대에선 오직 안무로만 표현되는 마가레타 역시 예전의 순수함을 되찾은 듯 빙그르르 춤을 춘다.

 

아르망은 그녀의 유약함을 알았다. 화려한 모습 이면 속에 감춰진 그녀의 순수한 모습을 알고,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을 갈라두는 것은 역시나 전쟁의 냉혹함이었다.

 

 

 

진실과 거짓


 

거짓은 극 중 내내 마타 하리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 요소로 작용한다. 마타 하리의 과거를 움켜쥔 ‘라두 대령’은 그녀에게 스파이라는 직책을 내린다. 아름다운 용모로 남자들에게 접근하기 쉬우며, 전시에도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마타 하리는 남성들만의 전유인 전쟁 속 '여성'이라는 지위로 전선에 뛰어들게 된다.

 

그러나 라두 대령 역시 마타 하리의 매력에 취해있는 상태였다. 그녀의 애인인 아르망을 자살 돌격이나 다름 없는 작전에 투입시킨 것은 상관으로서의 판단이 아닌 연적을 대하는 질투와 집착이었다. 아르망이 자신 때문에 돌아오지 못할 비행을 떠난 것을 알게 된 마타 하리는 결국 전쟁 중인 국경을 넘나들어 그를 찾아 나선다. 넘버 <내 길은 하나>는 오직 자신이 믿는 사랑을 따라 행동하게 된 마타 하리의 결단력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그녀가 정체를 속인 채 적국인 독일로 입국하는 장면에선 누구나 그녀가 스파이인 걸 들키게 되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정체가 탄로나고 이중 스파이의 누명을 쓴 마타 하리는, 결국 당국의 실책을 모두 뒤집어쓴 채 재판장에 서게 된다. 마타 하리는 하얀 색 비즈가 달린 옷을 입고, 다리를 꼬아 앉는다. 한결 부끄러움이 없다는 얼굴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전, 제 삶이 자랑스럽진 않지만, 부끄럽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재판장에서 ‘마가레타’라는 이름이 가진 치부가 모두 드러난 순간 그녀의 내면은 산산히 부서진다. 마타 하리는 고귀한 출생도, 사원의 신을 모시던 신비로운 여인도 아니었다. 자기 자신조차 그토록 부정하던 마가레타의 존재가 모든 이 앞에 드러나고 만다. 무대 앞쪽에서 들리는 앙상블 배우들의 신랄한 비난은 관객조차 몸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자신에게 스파이라는 직책을 부여한 라두 대령이 그녀를 배신하고, 그녀를 변호하던 아르망마저 끌려나갔다.

 

마타 하리는, 그럼에도 당당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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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순간>은 그런 마타 하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넘버다. 안나가 수놓은 빨간 드레스를 입고 마지막 무대로 향하는 그녀는 오히려 후련해보인다. 누명을 쓰고 사형대로 향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째서 그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쏟아지는 빛은 숭고하기까지 했다. 조국과 사랑 사이의 갈등 끝에 사랑을 저버린 라두 대령과 달리, 그녀는 자신이 사랑한 사람들에게 매순간 진실했기 때문이다. 마가레타로서 사랑 받은 기억들만 남긴 채, 그녀는 주어진 모든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리고 여기, 푸른 들판에 선 한 여자가 있다. 마침내 마타 하리와 마가레타의 합일을 이루어낸 그녀는 수많은 총구를 향해 마지막 키스를 보낸다. 피날레를 장식한 마타 하리는 오르골의 무용수처럼 무대 뒷편으로 저물고, 아르망은 마찬가지로 손키스를 보내며 그녀의 결말에 경애를 표하며 극은 막을 내린다.

 

 

 

마가레타와 마타 하리


 

뮤지컬 <마타 하리>는 초연부터 지금까지 몇 번의 대대적인 수정을 거쳤다. 스토리 라인, 넘버, 캐릭터까지 초연과는 전혀 다른 뮤지컬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러나 이번 시즌을 통해 비로소 '완벽'해진 마타 하리는 단순히 화려한 춤과 무대, 치정으로 이루어진 극이라 할 수 없다. 마가레타와 마타 하리. 두 자아의 합일을 이루어내는 과정이자, 사랑을 통해 진실된 자신의 모습을 인지하는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자신의 운명을 있는 힘껏 껴안기로 한 자의 마지막을 이토록 극적이고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 넘버 <마지막 순간> 이 끝난 후엔 언제나 시끄러운 총소리와 박수가 얽혀든다. 무대 위, 키스를 날린 마지막 포즈 그대로 멈춰버린 마타 하리. 뮤지컬 <마타 하리>를 본 모두는 그녀의 진실한 아름다움에 전율하게 될 것이다. 25년 3월 2일까지 서울 LG아트센터에서 만나볼 수 있다.

 

 

두 사람의 소중한 추억만 사랑의 약속만

스쳐지나간 평범한 날들의 행복만 내 품에 남길게

내 사랑은 영원해 걱정마 기억해줘

 

뮤지컬 마타 하리, <마지막 순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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