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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주인공 카야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책.

 

일을 시작하고부터 바쁘다는 핑계로 전처럼 진득하게 책을 읽는 것이 쉽지 않다. 출퇴근 길 혹은 자기 전, 짧은 시간 동안 하는 독서가 대부분이기에 가볍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단편집을 선호하곤 한다.

 

그러나 유일한 주인공을 가진 장편 소설에는 단편집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강렬한 몰입감이 있다. 한 인물을 오롯이 이해하고, 그가 처한 상황에 공감하고,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네는 경험은 역시 유일한 주인공을 가진 이야기를 읽을 때만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기 때문이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주인공, 카야를 만난 순간처럼 말이다. 단독 주인공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소설을 읽은 게 처음이 아님에도, 마치 내가 카야가 된 듯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책을 읽는 내내 푹 빠져들었다.

 

 

 

습지에 대한 생생한 묘사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1900년대 중반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연안 습지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카야는 습지의 작은 판잣집에서 홀로 생활하며, 습지 소녀라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로부터 차별받는다. 가족들이 전부 떠난 판잣집에 남아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한 카야에게 습지는 유일한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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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는 늪이 아니다. 습지는 빛의 공간이다. 물속에서 풀이 자라고 물이 하늘로 흐른다. 꾸불꾸불한 실개천이 느릿하게 배회하며 둥근 태양을 바다로 나르고, 수천 마리 흰기러기들이 우짖으면 다리가 긴 새들이 뜻밖의 기품을 자랑하며 일제히 날아오른다···

 

습지 속 여기저기서 진짜 늪이 끈적끈적한 숲으로 위장하고 낮게 포복한 수렁으로 꾸불꾸불 기어든다. 늪이 진흙 목구멍으로 빛을 다 삼켜버려 물은 잔잔하고 시커멓다.”

 

 

내가 카야에게 몰입할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습지가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광활한 습지의 물살과 각종 동식물, 시간에 따른 풍경의 변화가 매우 생생해서 평생을 도시에 산 나조차 습지를 무척 사랑하는 카야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굳이 상상하려 애쓰지 않아도, 카야가 사는 판잣집과 습지의 모습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그려졌다.

 

어떻게 이런 묘사를 할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작가인 델리아 오언스는 실제로 생태학자였다고 한다. 습지를 누구보다 오래 관찰하고,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이런 묘사를 할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에 대하여


 

이 책은 습지 소녀의 삶을 담은 이야기임과 동시에, 카야가 일생 동안 겪은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도 아주 깊고 오래된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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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야가 처음부터 혼자였던 건 아니다. 가족들은 계속되는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지 못해 차례차례 떠나고, 어린 카야만이 남아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살아남고자 애쓴다. 그리고 아버지마저 사라졌을 때, 완전히 혼자가 된 카야는 언젠가 돌아올 엄마를 기다리며 판잣집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엄마가 떠날 것을 알았음에도 잡지 못한 어린 카야의 마음. 그리고 습지 소녀라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로부터 받는 차별에 무뎌지지 못하는 카야의 외로움이 책을 읽는 내내 고스란히 전해졌다.

 

 

"델리아 오언스는 이 책이 '외로움에 대한 책'이라고 단언했고, 처음부터 '고립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습지의 판잣집에서 혼자 살아남으려 분투하지 않더라도, 이 시대의 우리는 각자 빌딩 숲이란 정글에서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며 하루하루 외롭다. 타인을 믿고 진정성 있는 관계를 맺기란 어렵고도 무서운 일이다."

 

 

책 말미, 편집자의 말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처음 읽었을 당시, 외국에서 홀로 타지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더욱 와닿았던 문장이다. 카야와 같은 특수한 상황이나 타지 생활을 해본 적이 없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외로움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종종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낼 때조차 문득 이유 모를 외로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의지하는 존재가 있더라도, 나의 내면을 오롯이 마주하고 솔직하게 대화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나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 스스로를 더욱 세심하게 살피는 동시에 소중한 이들에게 더욱 진심으로 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로움을 없앨 수는 없어도, 불안을 지울 수는 있으니까. 외로움이 결국 평생 함께할 감정이라면 보다 작고 적은 상태로 존재하길 바란다.

 

*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고 한다. 아직 보지는 않았지만 카야가 살았을 습지의 모습을 어떻게 담았을지 무척 궁금해진다.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습지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랐기에, 영화 속 습지의 풍경을 상상 속의 장면과 비교하며 감상하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영화를 보기 전 꼭 책을 먼저 읽기를 추천한다. 반짝이는 습지의 모습과 카야가 느끼는 외로움과 첫사랑의 감정,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긴장감까지. 이 모든 장면과 감정에 대한 세세한 묘사를 토대로 마음껏 상상하는 것은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특권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카야가 살았을 노스캐롤라이나 연안의 습지를 꼭 눈으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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