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이상하다. 우는 건 어릴 때나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어른이 되고 난 후에 나는 더 많이 울게 됐다. 슬픈 드라마나 영화를 봐서든, 갑자기 옛 사진을 보다가 너무 좋았던 때가 떠올라서든. 애틋한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면서든.
어렸을 때는 우는 게 일종의 ‘금기’였다. 꽤나 창피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친구와 다투거나 선생님께 혼나 눈물이라도 찔끔 보이는 순간에는‘야 얘 운다!’ 하고 누군가 교실이 떠나가라 외치곤 했다. 그럼 반 모두로부터 원치 않는 주목을 받게 된다. 그런 경험을 간접적으로나마 하게 되니 혼자 있을 때에도 ‘나는 울지 않는다’라며 스스로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니 매우 웃기다.
더 어릴 적에는 울음은 일종의 ‘고집’이었던 것 같다. 가족 모두와 에버랜드에 놀러 갔던 날, 한창 마법소녀물에 빠져있던 나는 소리 나는 요술봉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 요술봉을 사지 않으면 집에 가지 않겠다고 대차게 울었다는 에피소드를 부모님으로부터 몇 번이나 들었다.
그렇게 고집과 금기를 지나 어른이 된 지금, 울음은 꽤나 복잡다단한 무언가가 되었다. 이제는 억울하거나 무언가를 갖고 싶어서만 울지 않는다. 우는 게 창피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남들 앞에서 굳이 울진 않지만.
되려, 이제는 무언가. 눈물을 참는 것은 웃음을 참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눈물은 진짜, 진짜이기 때문이다. 일본어로 하면 혼또니 혼또 정도 되려나. 그만큼 우리의 순수한 내면 그 기저에 가까이 있다. 꾸며내지 않은 솔직한 감정 그 자체를 느끼면 무엇보다도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 울면서 이 글을 읽는다면 (그럴 리 없겠지만) 갑자기 웃으며 그칠지도 모를 만큼 울음에는 엄청나게 탁월한 건강 증진 효과가 있다.
심혈관계, 순환기, 호흡기, 면역계, 소화기계 등의 활동이 활발해져 신진대사에 도움을 주며, 목 높아 울면 복근 운동, 장 운동 효과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또, 눈물을 흘린 후에 불안과 스트레스 지수가 낮아진다는 생물학 연구 결과도 있다. 이쯤 되면 왜 ‘웃음치료’에 비해 ‘눈물치료’는 유명하지 않은지 궁금할 따름이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미국의 시인 겸 저널리스트, 엘라 휠러 윌콕스의 시 <고독> 중 일부이다. 긍정적인 사고의 중요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유명한 구절이다. 하지만 때로는 웃음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일들이 있기에, 명백한 '수용성' 고민들을 말끔히 흘려보내기 위해 가끔은 혼자 울어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웃음만큼이나 울음도 긍정한다면 좋겠다. 그리고 울음에 더 관대해졌으면 좋겠다.
절대 내가 울보 어른이어서는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