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을 바꾸면서까지 해를 바라본다는 뜻을 가진 꽃, 해바라기처럼 한 여인에게 첫눈에 반해 그녀만을 바라보는 한 남자의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가 여기 있다. 대한민국 대표 창작 뮤지컬 <베르테르>가 25주년 기념 공연으로 관객에게 돌아왔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괴테의 명작을 원작으로 한 베르테르는 초연부터 지금까지 뮤지컬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지난 30일, 길었던 연휴의 끝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한 채 신도림 디큐브 링크아트센터로 향했다. 극의 어떤 부분은 공감 가기도 했고, 또 어떤 부분은 개인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테르>가 담아낸 현실적인 캐릭터들, 발하임의 모습을 한눈에 보여주는 무대 연출, 극의 몰입도를 높이는 넘버들은 관객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현실적인 캐릭터들
베르테르는 발하임이라는 도시에서 롯데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롯데는 알베르트라는 듬직한 약혼자가 있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베르테르는 롯데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 않고 결국 발하임을 떠난다. 여기까지가 1막의 내용이다. 2막에서는 다시 발하임에 돌아와 롯데에게 고백하려는 베르테르의 모습이 담겼다. 하지만 돌아왔을 때는 롯데가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고, 상황은 점점 비극으로 치닫으며 베르테르가 자살을 하며 극이 마무리된다.
1막에서는 롯데를 향한 베르테르의 순수한 사랑에 초점을 두고 관람했다. 하지만 2막에서는 베르테르의 사랑을 그저 순수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결혼한 상태인 롯데에게 계속해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 애정을 갈구하는 베르테르의 모습은 어느 부분에서 스토킹으로 보이기도 했다. <베르테르>를 관람한 이들의 반응이 갈리는 이유도 이러한 베르테르의 행동 때문인 듯하다.
시작은 순수한 사랑이었겠지만 그 사랑의 끝은 비극적이었다.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결국 죽음을 택하는 베르테르의 선택은 비겁해 보이기도 하다. 극 이후 롯데와 알베르트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갔을까. 해피엔딩은 아니었을 것이다. 롯데는 베르테르, 알베르트 두 사람 모두에게 죄책감을 가지며 살아갈 것이고, 알베르트는 베르테르에게 흔들렸던 롯데의 사랑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2막에서는 롯데와 알베르트 입장도 함께 생각하며 극을 관람했다. 롯데는 베르테르에게 어떤 마음이었을까.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롯데도 베르테르를 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롯데와 베르테르는 흔히 말하는 '티키타카'가 잘 통했다. 롯데는 베르테르에게 책을 빌려주기도 하고, 약혼자인 알베르트에게 보내는 편지에 베르테르의 이야기를 쓰기도 했다.
롯데는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이다. 결혼을 약속한 남자를 사랑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과 대화가 잘 통하는 베르테르를 놓지 못한다. 베르테르에 대한 롯데의 호감은 두 사람의 짧은 입맞춤에서도 드러난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잘못을 알면서도 그 사이에서 유혹에 흔들리는 롯데의 모습은 현실적이었다.
극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인물은 알베르트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롯데는 알베르트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베르테르의 이야기를 썼다. 그렇기 때문에 알베르트는 분명히 롯데의 흔들리는 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알면서도 그녀와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베르테르에게 젠틀하게 대했던 알베르트의 모습은 안쓰럽게 느껴진다.
극의 몰입도를 높인 뮤지컬 넘버들
그대는 어쩌면 그렇게 해맑을 수 있는지
당신의 그 고운 미소는 나에게 다가와 손짓하는데
<어쩌나 이 마음>
<어쩌나 이 마음>은 사랑에 빠진 베르테르의 심정이 표현된 곡이다. 비가 갑자기 쏟아졌던 날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신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다가왔던 롯데에게 반한 베르테르의 풋풋하고 설레는 마음을 부드러운 피아노의 선율과 베르테르의 심정을 담아낸 가사와 함께 풀어냈다. 해맑고 고운 롯데의 모습과 그런 롯데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아이처럼 순수하고 솔직하게 풀어낸 가사를 집중해서 듣다 보니 베르테르의 입장에서 롯데를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는>이라는 곡에서는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친구가 되는 롯데와 베르테르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공연장에서 만난 베르테르 역을 맡은 김민석 배우와 롯데 역을 맡은 이지혜 배우의 목소리 합은 두 사람의 케미를 한층 더 높였다. 풋풋한 케미를 담은 노래는 공연이 끝나고 난 뒤도 넘버를 찾아 듣게 만들었다.
나 그대 이제 이별 고하려는데
내 입술이 얼음처럼 붙어버리면
나 그대를 차마 떠나려는데
내 발길이 붙어서 뗄 수가 없으면
<발길을 뗄 수 없으면>
이외에도 발하임을 떠나기 전 기차역에서 부르던 슬픔이 가득 찬 베르테르의 <발길을 뗄 수 없으면>은 롯데를 향한 베르테르의 감정의 깊이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발길을 뗄 수 없으면>은 1막에서는 원곡대로 2막에서는 리프라이즈되어 <얼어붙은 발길>로 총 두 번 등장한다. 이때 고백을 포기하고 돌아서서 부르는 후회가 담긴 1막의 넘버와 다시 돌아와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죽기 전에 부르는 2막의 넘버는 베르테르의 감정 변화를 세세하게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사랑이 한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변화를 보여준다.
공연의 완성도를 끌어올린 무대연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공연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넘버들이 극의 몰입도를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무대 위 구조물과 소품, 조명은 공연의 완성도를 한층 더 끌어올렸다. 무대 중앙에 설치되었던 회색 콘크리트 구조물은 베르테르의 애절한 사랑을 더 강조시켰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구조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후 롯데와 알베르트는 구조물 위에서 결혼을 하고, 베르테르는 똑같은 구조물 위에서 자살한다. 같은 구조물 위에서 다르게 흘러가는 이야기는 극명하게 대비되어 롯데를 향한 베르테르의 사랑이 더 안타깝게 느껴진다.
엔딩 장면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베르테르가 자살하는 장면에서 무대 위에는 수많은 해바라기들이 놓여있다. 하지만 베르테르가 자살하려 하자 꽃들은 쓰러지고 한 송이 꽃만이 남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지막 해바라기도 쓰러진다. 해바라기가 쓰러지는 장면은 베르테르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만약 그의 죽음이 총성으로 표현되었다면 식상한 엔딩이었을 수 있겠지만 롯데에게 반한 그 순간부터 해바라기처럼 롯데만을 바라봤던 그의 죽음을 해바라기가 쓰러지는 것으로 표현함으로써 관객들에게 공연이 끝나고 난 뒤에도 깊은 여운을 선사했다.
<베르테르>는 때로는 행복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때로는 고통을 가져다주기도 하는 사랑의 모습 보여주며 우리에게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만든다. 캐릭터, 넘버, 그리고 무대 연출까지 <베르테르>는 2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들만의 독보적인 매력을 만들어왔다.
동화에 자주 등장하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엔딩은 아니지만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는 해피 엔딩과는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괴테의 명작을 강렬한 무대로 만나보고 싶다면 <베르테르>를 관람해 보길 추천한다. 뮤지컬 <베르테르>는 3월 16일까지 서울 디큐브 링크아트센터에서 공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