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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 

이 글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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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본 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문득 생각나는 작품이 있다. 그중에서도 오늘은 뮤지컬 <서편제>를 다뤄보려고 한다. 여기서 ‘서편제’는 판소리 유파의 하나로 호남 서남부 지역(광주, 나주, 보성, 고창 등)에서 발달한 소리제를 뜻한다. 동편제가 선이 굵고 꿋꿋한 소리제의 특성을 갖는 반면, 서편제는 섬세한 감성과 세련된 기교의 발달이 부각된다. 제목의 뜻을 알고나면 자연스럽게 의아함이 생긴다. ‘뮤지컬’과 ‘판소리’의 만남이라니.

 

<서편제>는 서양 공연예술 장르에 국악, 특히 판소리를 결합한 뮤지컬이다.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를 원작으로 하며, 뮤지컬 장르답게 음악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한국에서만 만들 수 있는 ‘뮤지컬’과 ‘국악’의 결합, 유일무이한 한국 창작 뮤지컬 <서편제>를 소개한다.

 

 

 

한국의 음악, 한국의 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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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좋아하시게 된 내력이라도 있으시오?”

“그쪽 소리에는 내게 무엇보다 반갑고 소중한 것이 있어요.

나는 그 소리를 찾으려 허구한 세월을 허송하고 다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의 음악, 판소리


 

<서편제>는 소리를 청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극의 초반부터 언급되는 이 ‘소리’는 주인공 송화가 자신의 생애 동안 추구하던 ‘판소리’를 의미한다. 또한 <서편제>의 1막과 2막의 핵심 장면은 바로 ‘판소리’를 하는 장면이다. <서편제>에 등장하는 판소리는 ‘사랑가’와 ‘심청가’로, 관객에게도 매우 익숙한 내용들이다. 먼저 1막에서는 춘향전의 ‘사랑가’, 2막에서는 ‘심청가’ 중에서도 ‘심봉사가 눈뜨는 대목’이 등장한다.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사랑이로구나 내 사랑이야

이히 내 사랑이로다

아매도 내 사랑아

(중략)

저리 가거라 뒤태를 보자

이리 오너라 앞태를 보자

아장아장 걸어라 걷는 태를 보자

방긋 웃어라 잇속을 보자

아매도 내 사랑아

 

- 춘향전, ‘사랑가’ 대목

 

 

판소리를 잘 몰라도 한 번쯤 들었을 법한 이 구절은 작품 내 어린 송화가 아버지에게 혼난 이복동생 동호를 달래기 위해 이몽룡 역할을 맡아 부른다. 이후 동호에게 ‘춘향가’는 사랑하는 누나와 함께 보냈던 소중한 추억 속 한 장면으로 남는다.

 

 

심황후 물으시대 거주성명이 무엇이며 처자 있나 물어보아라

심봉사 처자 말만 들으면 먼 눈에서 눈물이 뚝뚝뚝 떨어지며

 

(중략)

 

청이라니? 이게 웬말이냐 내가 죽어 수궁을 들어왔느냐

내가 지금 꿈을 꾸느냐

죽고 없는 내 딸 심청 여기가 어디라고 살아오다니 웬말이여

내 딸이면 어디 보자

아이고 갑갑하여라...내가 눈이 있어야 내 딸을 보지

 

어디 어디 어디 내 딸 좀 보자

 

두 눈을 끔적끔적끔적끔적끔적 거리더니 눈을 번쩍 떴구나

 

- 심청가, 심봉사 눈 뜨는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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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의 핵심인 ‘심청가’ 중 ‘심봉사가 눈뜨는 대목’은 <서편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중요하고 감동적인 장면이다. 자신의 소리를 찾겠다며 누나를 떠났던 동호는 수십 년이 지나서야 누나의 완성된 소리를 듣게 된다. 7분경 이어지는 긴 대목을 송화가 온전히 이끌어 나가고, 동호는 이를 받쳐주며 북을 친다.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가족과 오랜 시간 끝에 재회한 눈이 먼 심봉사와 송화. 두 인물 간의 공통점은 무대를 지켜보는 관객들의 마음을 울린다.

 

 

 

한국의 정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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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살다보면 살아진다 그저 살다보면 살아진다

눈을 감고 바람을 느껴봐 엄마가 쓰다듬던 손길이야

멀리 보고 소리를 질러봐 아픈 내 마음 멀리 날아가네”

 

- 서편제, <살다보면> 中

 

 

‘한’이라는 정서는 무엇일까. 원망, 분노, 슬픔, 억울함, 안타까움 등의 감정이 한데 뒤섞여 응어리진 것을 보통 ‘한’이라고 부른다. 단어의 정의만으로는 와닿지 않는, 한국인의 고유 정서라고도 불리는 ‘한’. 도대체 그 ‘한’이 무엇이길래 송화는 한을 품으며 소릿길을 걸어야 하는가. 이러한 ‘한’은 <서편제>의 중심 소재가 된다. 송화를 큰 소리꾼으로 만들기 위한 아버지 유봉의 그릇된 욕심은 결국 자신의 손으로 딸의 눈을 멀게 만든다.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유봉의 행동은 현대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어려우며,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위와 같은 내용을 접한 관객들이 마음 한구석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서편제>가 전달하는 건 단순히 가부장적인 아버지에 의해 희생된 딸의 이야기가 아니다. 극을 보는 관점을 달리한다면, <서편제>가 담은 이야기는 한 여인의 ‘예술혼’, 그리고 역경을 이겨내고 이를 소리로 승화해낸 ‘인간의 삶’이다.

 

송화는 어떠한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자신을 떠나가고, 눈이 멀어도 고통과 외로움을 승화해 자신의 소리를 완성해낸다. 마지막 ‘심청가’가 관객의 마음의 응어리를 씻겨내리는 이유도 바로 송화의 삶의 행적에서 드러나는 ‘한’의 완성과 해소 때문일 것이다.

 

 

 

뮤지컬 <서편제>가 가진 작품성과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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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소리길, 두 소리의 만남과 조화

 

<서편제>는 판소리를 다룬다는 특징을 지니지만, ‘창극’이 아니라 엄연한 ‘뮤지컬’ 장르의 공연이 다. 이 중심을 잡아주는 캐릭터가 바로 송화의 이복동생 ‘동호’다. 송화의 소리는 ‘판소리’로 대표되지만, 아버지와 판소리가 싫어 뛰쳐나간 동호는 팝, 락, 발라드 등 다양한 현대 음악 장르를 소화한다. 실제 판소리를 제외한 <서편제>의 노래는 유명 작곡가 윤일상이 참여해 만들었다는 점도 특별하다.

 

송화가 선택한 우리의 전통과 동호가 추구하는 서양의 문화가 처음에는 부딪히지만, 결국 다시 만나 어우러진다. 서양 음악과 우리의 전통 국악이 조화를 이루는 작품 속 노래들은 장르를 넘어 ‘음악’의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2010년 초연, <서편제>가 시도한 두 장르의 만남은 글로벌화가 활발히 진행되고, K-문화가 세계에서 주목을 받는 시대 속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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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를 표현한 무대

 

 

“길을 걷는 발길 발길 닿는 유랑

멈추지 않는 이 길들 

길에 부는 바람 바람의 소리

먼짓길 넘으며 가는 길들”

 

- 서편제, <유랑의 기억1> 中

 

 

<서편제>는 원형의 ‘회전 무대’와 겹겹이 붙여진 ‘한지’를 활용해 무대를 구성했다. 유랑하는 유봉과 두 남매는 원형의 회전 무대로 이루어진 길을 정처 없이 걷는다. 이 길은 득음을 하기 위한 예술가의 한이 서린 소릿길이자, 한치 앞을 알 수 없이 걸어야하는 고단한 인생길 모두를 상징한다. 실제 400여 장의 한국화를 빛으로 다시 그려낸듯한 수묵화 영상들은 한지와 더불어 한국적인 미를 담아낸다. 폭포가 쏟아지고, 매화꽃이 흩날리고, 눈이 내리는 수묵화 배경은 사계절이 변화하는 동안 소리 공부에 매진하는 송화의 인고를 보여준다.

 

<서편제> 속 한국적 미를 이야기할 때 안무 또한 빠질 수 없다. 극 중 ‘부양가’는 한국적인 특색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평생을 소리꾼으로 산 유봉의 죽음을 담아낸 이 장면은 엄숙하고 제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부양가’라는 제목처럼 국악적인 색채와 더불어 흰색 옷을 입은 앙상블들의 무용은 아름답고 우아하고, 경건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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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희생이라 했고, 그녀는 인생이라 했다”

 

 

<서편제>를 소개할 때 쓰이는 위의 문구는 이 작품을 그대로 반영한다. 아버지에 의해 희생된 인물이 아니라, ‘나의 소리길’을 걸어간 예술가 송화의 인생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물론 <서편제>가 고전문학이 가진 ‘낡은 텍스트’의 측면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송화 역할의 이자람 국악 감독의 말처럼, “우리는 고전 없이 살 수 없고, 그걸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지금 시대 예술가들이 할 일”이다. 우리는 관객으로서 고전 내용을 어떻게 해석해 무대에 올리는지, 과연 우리나라의 ‘한’을 어떻게 표현하고자 노력했는지를 지켜보면 되는 것이다.

 

두 음악 장르의 매력과 조화를 담은 <서편제>가 다음 시즌 공연을 통해 관객들에게 ‘국악’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시각으로 다가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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