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목련 꽃잎으로 항상 하던 놀이가 있었다. 바로 목련 풍선을 부던 일이다. 깨끗한 목련 꽃잎을 주워서, 꽃받침을 살짝 잘라 살살 바람을 불어넣는 일. 사실 주변 어른들이나 친구들처럼 예쁘게 성공한 적은 없었지만, 나에게 목련 풍선은 봄이 오면 떠오르는 놀이 중 나였다. 나에게 놀이를 알려준 어른들, 그리고 친구들처럼 목련풍선을 세대를 넘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어져 온 놀이였다.
연극 <목련풍선>은 세대를 넘어 이어져 온 목련 풍선이라는 놀이, 그리고 목련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상실 이후 남은 사람들이 행하는 애도, 그리고 상실에 대한 감각이 작품 전반에 깔려 있다.
타자와의 느슨한 연결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연서의 증조할머니는 전쟁 때부터 누구든 먹고, 자고, 언제까지고 머물고 갈 수 있게 집 대문을 열어두었고, 분옥 역시도 그런 환대를 실천하는 인물이다. 그렇게 현정과 현성 두 사람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분옥의 딸이 되었다. 현정은 이제 그만 대문을 닫으라고 말하지만, 분옥은 손님을 위해 계속해서 대문을 열어놓는다. 대문을 열어두었기에 집에는 분옥의 손주 아라와 태환, 그리고 죽은 연서의 연인 영서까지 손님으로 찾아온다.
분옥의 집에 모인 손님들은 모두 너무 가깝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상실에 대한 감각을 공유하고 있는 사이이다. 서로 상실의 대상은 조금씩 다르더라도, 모두가 상실에 대한 감각을 바탕으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느슨한 연결의 감각이 더더욱 죽은 연서와도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게 만든다고 관객으로서 느꼈다.
연극 <목련풍선> 공식 이미지 - 출처 :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예매 페이지
목련, 그리고 애도의 이미지
죽음, 그리고 애도의 감각을 다루고 있지만 연극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일은 없다. 모두의 마음 고통을 남겼던 연서의 죽음은 극이 시작되기 한참 전에 일어난 일이며, 분옥이 사랑했던 영진 할매의 죽음은 그보다 한참 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애도는 상실을 마주하고, 그 현실을 인정함으로써 잃어버린 것을 온전히 떠나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은 1년 가까이 되는 오랜 시간을 통해 이뤄진다. 하지만, 분옥의 가족, 손님들은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분옥은 영진의 죽음을, 그리고 가족들은 연서의 죽음을 온전히 알 수 없다. 영진의 죽음이 정말 공장에서 나온 폐기물 때문이었는지, 연서를 죽게 한 뺑소니범은 도대체 누구인지. 애도가 지속해서 지연되는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불리는 만가는 지연된 애도의 과정을 환기하는 동시에, 온전한 애도를 향해 나아가게 만든다. 이는 살아있는 자들이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동시에 죽은 자 또한 산 자들의 세상에서 떠나는 의식이기도 하다. “나는 가네”라는 노랫말과 함께 분옥과 영서의 곁에 남아있던 연서는 떠난다.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나아가며 애도의 과정은 이어진다.
연극 <목련풍선> 무대 사진
연극은 떠난 이들의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는 데 중점을 두지 않는다. 단순히 남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상실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서로가 느슨하게 연결된다. 누구든지 손님으로 맞는 분옥의 집에 모인 아라, 태환, 그리고 영서까지도. 애도가 어려운 상실 앞에서 모인 손님들은 그 감각을 바탕으로 느슨하게 연결된다.
그 연결은 작중 목련이라는 소재로 상징된다. 분옥이 남기고 간 목련 풍선이 꽃을 피우고, 손녀 아라가 분옥이 알려준 대로 목련 풍선을 분다. 누군가 떠나가고 남은 자리에는 목련이 남았다. 연극 <목련풍선>은 누군가가 숨을 불어넣고 남겨둔 목련 풍선처럼, 극장을 나가는 관객의 마음속에 숨결 하나를 불어놓고 떠나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