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한 무언가를 가진다는 건
참 근사한 일이다.
당신은 거기 서서
엄청나게 커다란 양배추
혹은 바이올린
혹은 밝은색 풍선을
들고 있다.
그건 그 자체로 일이다.
한 가지만 하는 단순한 행위
- <우리가 인생에서 가진 것들> 中
위 인용은 도서 <우리가 인생에서 가진 것들>의 첫 그림이 등장하기 한 페이지 전의 내용이다.
다음 장부터는 저자 마이라 칼만의 그림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자그마한 분홍 컵을 들고 있는 여자, 빨간 풍선 다발을 들고 공원을 산책하는 여자, 책을 보는 여자 등… 마이라 칼만은 다양한 색채를 활용해 여러 여자를 그려냈다.
여자들은 비단 어떤 물건만을 들고 있는 게 아니다. 가까스로 정신을 붙들고 있기도 하고, 꼿꼿하게 버티고 있기도 하며, 어깨 위에 세상의 무게를 짊어지기도 한다.
결국, 마이라 칼만의 그림 속 여자들은 무엇을 들고 있던 간에 모두 '참 근사하면서도 그 자체로 일'인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위로를 받는다. 나 역시 어떤 것을 들고 있든, 그것이 물건이든 아니든, 잔잔한 일상 속에서 근사하고 숭고한 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내가 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가 인생에서 가진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의 경우에는 책을 읽을 땐 책을 들고 있었고, 글을 쓰는 지금은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다. 생각해 보니 정말 모든 게 다 나름의 일이다.
내가 무언가를 들고, 만지고, 잡고 있기까지의 모든 과정에는 다 크고 작은 이야기가 숨어있다. 그저 이유 없이 손을 갖다 대고 있는 물건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이 책 속 여자들의 손길이 닿은 모든 것들에도 다 갖가지 이야기들이 숨어 있겠지. 그 이야기엔 어떤 희로애락이 담겨 있겠지. 여러 생각이 든다.
마이라 칼만은 그림 속에 자신의 가족들을 그려내기도 했다. 서로를 미워했던 시어머니와 쌍둥이 자매,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던 어머니, 점점 더 멀어지며 방탕했던 아버지, 늘 초췌하고 심란해 보였던 할머니.
평범한 여자들의 그림들 사이에 불쑥불쑥 등장하는 저자의 가족 이야기는 담담한 서술 속에서 묵직한 울림과 교훈을 준다.
하지만 어머니는 결국 아버지를 떠났고
자신의 시간을 찾았다.
그런 시간을 찾는 게 우리가 원하는 전부다.
당신은 시간을 찾자마자 더 많은 시간을 원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 사이에 더 많은 시간을.
충분한 시간이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절대 붙들고 있을 수도 없다.
너무나 이상하다.
우리는 살아간다. 그런 다음 우리는 죽는다.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하다.
- <우리가 인생에서 가진 것들> 中
이 책을 만난 날은 내 생일이었다.
생일 선물을 받아보는 기분으로 침대에 대충 걸터앉아 책을 넘겨보았다가 앉은 자리에서 책을 끝까지 다 읽었다. 흘러가듯 편안하게 페이지를 넘기며 나의 일상도 이 책 속 그림들처럼 아름다울 수 있음을, 내가 들고, 잡고, 만지는 모든 것들이 모두 나의 삶 속에서 가치 있게 연결된 것들임을 되새김질할 수 있었다.
마이라 칼만의 TED 영상이다.
작품에 관한 설명과 후일담이 있으니 들어보면 좋을 것 같다.
책의 처음과 끝에 마이라 칼만의 메시지가 있다. 이것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해 본다.
두려워 마세요
꼭 버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