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영국 로열 발레단에서 초연된 아서 피타 안무의 'The Metamorphosis(변신)'은 카프카의 ‘변신’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의 이야기와 구도를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무용극 특유의 몸짓에 의거한 전개나, 무대 연출, 그리고 소설의 상상적 허용을 인간의 몸으로 재현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정서를 표현하기도 했다.
카프카의 원작을 무대나 영상 등으로 가시화한다고 할 때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벌레의 이미지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하는 문제이다. 특히나 컴퓨터 그래픽이나 어떠한 효과 없이 무대 위에서 실제로 벌레로 형상화된 무언가를 컨트롤해야 하는 공연예술 장르의 경우에는 인간이 벌레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직관적이면서도 새로운 연출을 고민해야 한다. 그 지점에서 안무가가 택한 방법은 무용수의 유연함과 몸선을 활용한 몸짓과 끈적한 세피아색 잉크를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공연이 지속되며 그레고르 역의 무용수는 자신의 방으로 상정된 공간 전체를 오가며 움직이고, 새하얀 무대 세트를 세피아색 잉크로 뒤덮으며 벌레의 움직임과 동선을 시각적으로 강력하게 제시한다. 무대는 크게 그레고르의 방과 가족들이 일상을 보내는 부엌 공간으로만 나뉘어 있기 때문에, 벌레의 몸을 한 그레고르의 상황과 감정이 고조에 다르는 과정에서 점차 그의 몸짓이 격렬해지고, 활동 반경이 커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주인공 그레고르는 변신 이전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중이다. 작품은 그레고르가 매일 똑같이 출근하고, 귀가하는 루틴을 반복적으로 재현함으로써 그의 일상이 얼마나 따분하고 권태로웠을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렇게 반복적인 일상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가족들 역시 그레고르를 중심으로 매일 비슷한 삶 속에서 살아감을 보여주기도 하며, 동시에 철부지인 동생과 권위 없는 부모의 모습을 재현함으로써 그레고르가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어머니는 매일 출근하는 아들을 위해 사과 하나를 식탁에 올려두지만, 이른 아침 일어나 그것을 챙기는 그레고르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그가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느끼는 고립감이 고조되어 감을 살펴볼 수도 있었다.
그러다 그는 하루 아침에 벌레로 변신해버렸다. 어머니는 식탁에 놓인 사과가 그대로임을 발견하면서 아들에게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챘고, 이후 가족들은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를 마주하길 꺼린다. 무작정 무시하거나 피하는 것은 아니지만, 크게 돕거나 반기지도 않는다. 가족들 중 동생은 가장 입체적이고 변덕스러운 태도로 오빠를 대한다. 평소와 같이 오빠에게 다가가고 챙겨주기도 하지만 경멸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어머니는 작품의 후반부까지 아들의 변화를 마주할 용기를 내지 않는다.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청소부 아주머니만이 그레고르에게 한결 같이 호의적인 모습을 보인다. 가족들은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신했기 때문에 생계에 위협을 받거나 안 좋은 소문에 휩싸일 가능성이 있지만, 청소부는 그럴 일이 없기 때문이다. 전과 다르지 않게 꼬박 꼬박 급여까지 받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청소부는 그레고르와 어떠한 이해관계도 얽혀 있지 않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의 본질을 잊지 않고 인정하는 태도를 보인다.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는 점차 온 몸에 세피아 잉크를 뒤덮으며, 그가 점점 더 돌이킬 수 없을 만큼의 변화를 겪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온 몸에 세피아색 수트를 입은, 일종의 벌레로 여겨지는 세 사람이 그레고르의 방에 찾아온 장면을 기점으로 그러한 변화가 확연히 드러난다. 그 장면이 극 중에서 실제 상황인지 혹은 그레고르가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대해 받은 충격으로 인한 정신적 현상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때부터는 그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접어두게 된다. 이는 하숙을 위해 집을 찾아온 세 사람이 다른 세 가족들과 춤을 추는 장면과 대비가 되기도 한다. 그레고르는 벌레로서 더 깊은 심연으로 빠져버리는 반면, 남은 가족들은 그레고르를 방치할지라도 집에 하숙을 내서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을 찾고 사회적 역할을 찾아간다는 점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한편 ‘변신’ 이후와 이전에 가족들이 그레고르를 대하는 태도는 분명히 달라졌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레고르의 입장을 떠올려 본다면 그가 느끼는 고립감은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변신 이전에도, 이후에도 변함없이 그는 가족 중 홀로 외로운 입장에 놓여 있다. 그의 여동생은 변신 전후로 모두 오빠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둘의 그러한 관게가 가족에게 특별한 활력이나 끈끈함을 더해주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벌레라는 모습은 그레고르의 본질이 아닌, 그를 덮고 있는 외피일 뿐임에도 그로 인해 가장으로서의 권위와 기능이 허무하게 무너져 버리는 것을 포착할 수 있었다. 이는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레고르의 본질이나 내면보다는 경제적 원천으로서, 그리고 가장 혹은 장남으로서의 지위에 더 집중해온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그렇기에 ‘벌레’라는 표면적 상황을 비유적으로 해석한다면, 그가 실직을 했거나 사고 등으로 인해 일반적인 수준 이하의 장애를 갖게 되어 사회적인 활동을 못하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마지막에 그가 결국 창문 밖으로 떨어지는 것은 일종의 해방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가 실제로 죽음을 맞이했든, 혹은 갇혀 있던 집안을 벗어나 새로운 도약을 하는 것이든 간에 그의 이탈은 일종의 해방이다. 더욱이 그가 몸을 던질 때 창 밖은 노란 빛으로 물들었고, 이는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연출이다. 따라서 적어도 그레고르 자신에게 만큼은 죽음 혹은 이탈이 부정적이거나 절망스러운 엔딩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가족 중에 그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다가갔던 여동생이 마지막 애도의 상황에서 노란 원피스를 입고 춤을 추는 것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 능력이 있는 오빠가 있는 상황에서 동생은 자기가 하고 싶은 춤을 마음껏 추며 사는, 자유롭고 천진난만한 막내였지만 어떤 이유로든 오빠가 부재한 상황에서 그 몫은 오롯이 동생에게 가기 마련이다. 동생은 가족 내에서 오빠의 역할을 이어 받을 것이고, 이를 앞둔 상황에서 가장 진심으로 오빠를 애도할 수 있는 사람은 동생이다.
그레고르가 떨어진 창문 앞에서 춘 춤은 어쩌면 그녀의 마지막 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