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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메모리'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초반부를 보며 장르가 멜로는 아닌가 싶었다. 포스터의 분위기만 보고 착각했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으로는, 고등학교 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울에게 실비아가 당신이 학창 시절 성폭력 가해자였음을 말해주는 장면에서 말이다. 이 둘의 사랑이 도무지 상식선에서는 꽃필 수가 없었기에. 그것이 실비아의 착각이었음이 밝혀진 몇 분 뒤에는 잠시 벙쪘다. 아 그렇지. 상대가 기억을 못 한다고 해서 그 반대가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 기억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몹시도 중요한 과정이다. 아니, 중요한가?
잊지 못하는 여자와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
여자 주인공, 실비아는 잊으려고 한다. 그녀를 크게 흔든 청소년기의 기억을 잊지 않으면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기억을 없애기란 쉽지 않기에 실비아는 과거와 그녀의 현재를 단절하기로 한다. 여기서 단절이란 없었던 셈 치는 것이 아니다. 그건 단절이 아닌 왜곡이다. 실비아의 엄마가 그러하듯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라고 치부한다고 정말 없었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거니와 결국에는 피해자의 상처를 헤집는 꼴이 된다. 그래서 그녀는 바뀌지 않는 과거를 둔 채로 떠난다. 사실을 부정하는 어머니로부터, 그럼에도 없어지지 않는 기억으로부터.
시도가 무색하게 그녀의 삶은 여전히 과거에 상당 부분 붙잡혀있다. 심지어는 그녀의 딸, 애나를 키우는 방식에도 스며들어있다. 애나의 이성 교제를 철저하게 막고 실비아 자신도 이성과의 접촉을 최소화한다. 그러다 애꿎은 사울을 가해자로 지목하기도 하고. 거대한 상처에서 삶을 분리하는 것이 그리 쉽겠냐마는 그럼에도 실비아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단절을 시도하는 실비아와 다르게 사울은 이미 그 단절이 자의와 무관하게 진행 중이다. 그의 기억은 쉽게 없어진다. 그래서 실비아가 그가 하지 않은 일로 그를 비난했을 때 설령 본인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그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 심지어는 스스로에게도. 자신의 의지가 들어갔을 때 망각은 안전한 도피 수단이지만 자의와 무관하게 벌어지는 망각은 자립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렇게 기억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두 인물에게 고통을 준다.
사울이 주체적으로 메모를 하는 순간이 있다. 메모라는 것은 기억과 떼레야 뗄 수 없는 행위이다. 멀쩡한 인지기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곧잘 메모 앱을 쓰는 이유는 메모를 작성함으로써 기억하고 싶은 것과 기억해야 하는 것을 분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비아가 오해를 풀었을 때, "당신은 가해자가 아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비로소 펜을 든다. "이거, 메모 좀 해도 될까요?"라며. 이것은 실비아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기억해야만 하는 사실이다. 사울은 본인이 괜찮은 사람임을 확인하기 위해 기억을 붙들려 하지만 실비아는 괜찮은 사람인 척 껍데기라도 뒤집어쓰기 위해 기억으로부터 회피한다.
세상이 당신을 괜찮지 않다고 할지라도
하지만 세상은 그들을 괜찮은 사람으로 봐주지 않는다. 따지자면 비정상으로 보는 편에 가깝다. 동생은 치매 환자인 형을 감시하고 통제한다. 물론 중증 치매 환자를 혼자 집에 두는 것은 위험한 일이 맞다. 하지만 사울은 적어도 아직은 인지 능력이 그렇게까지 훼손되지 않았다. 결정의 합리성을 의심하고 연애 감정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동생의 반응이 과도하다는 말이다. 사울의 감정은 어느 순간 무시되고 '강아지처럼 약속에 끌려다니는' 주체성 없는 존재로 격하된다.
그런가 하면 실비아의 어머니에게 실비아는 '착했지만 이상해진 애'이다. 그 이유는 궁금하지 않다. 사실 알지만 모르는 척 덮어둔다. 자신의 남편이 딸에게 저질렀던 끔찍한 잘못을 마주하는 것보다 이상해진 애가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 쉽기 때문이다. 기억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 사람은 알고 보면 실비아가 아닌 실비아의 어머니다. 그럼에도 딸이 이상해지더니 '정신이 온전치 않은' 사울을 만난다며 손가락질한다. 그건 사울의 형 쪽도 마찬가지다. 참 신기한 일이다. 사울과 실비아의 가족은 그들 자체를 그리 못미더워하면서도 그들이 교제하는 상대방도 마음에 차지 않아 한다. 그런대로 괜찮게 살아보려는 사울과 실비아의 노력은 그들의 가족 앞에서 번번이 부정당하고 무너진다.
그러고 보면 딱 한 명, 이들의 사랑을 응원해 주는 존재가 있다. 바로 실비아의 딸, 애나. 애나는 어딘가 전지전능하다. 암울한 어른들의 관계와 상황 속에서 홀로 빛나는 애나는 신 같기도 천사 같기도 하다. 물론 실비아와 다투기도 하고 오해도 하지만 애나는 결국 바른 판단을 한다. 그녀는 상처받은 어른들에게 구태여 짐을 얹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울의 손을 잡고 실비아에게 데려다준다. 마침내 재회한 마지막 장면에서 사울은 어떻게 왔냐는 실비아의 말에 이렇게 대답한다.
"몰라, 애나가 데려다줬나 봐."
사랑이 물론 모든 것을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그저 이들이 행복하기를
사랑이 물론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불안했던 장면이 두어 개 정도 기억난다. 화장실에 다녀와서 문 두 개 앞에서 가만히 멈춰있던 사울의 모습. 혹시나 실수로 애나의 방에 들어가서 트라우마를 안겨줄까 봐 두려웠다. 그리고 실비아의 전화를 받지 않았을 때는 실비아를 사랑했다는 기억마저도 잃은 거면 어쩌나 싶었다. 기억을 잃으면 삶은, 그리고 사랑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다행히도 영화는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는다. 사울의 상태는 여전히 초기 치매에 머물러 있는 것 같으니. 치매가 진행된다면 그는 결국 실비아와의 사랑을 잊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울이 이토록 약한 존재이기에 실비아가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것이리라. 언젠가 부서질 지금의 순간에 솔직한 사람이기에. 어머니의 모진 말에 과거를 다시 떠올리고 애써 추스른 마음이 산산조각 나는 경험을 한 실비아는 집에 돌아와 한참을 운다. 욕조에 들어가서도 그녀는 몸이 녹아내릴 듯 계속해서 울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사울은 함께 욕조에 빠진다. 그녀의 눈물에 함께 빠지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울의 모습에 실비아의 울음은 이내 웃음으로 바뀐다. 괜찮지 않지만 괜찮아지려 노력하는 부서진 서로를 껴안을 수 있는 것은 서로뿐이다.
좁은 욕조에 풍덩 빠진 욕조 장면처럼 장면의 구성은 감성적이되 현실적이다. 아름답지만 탐미적이지는 않다고 해야 할까. 일부러 아름답게 그린 장면들이라기보다는 이들의 감정이 아름다울 뿐이다. 그리고 노래는 이 아름다운 사랑의 매개체이다. 아내와 사울이 함께 듣던 "A white shade of pale'은 아내가 떠난 뒤에도, 실비아가 떠난 뒤에도 사울과 함께한다. 사울이 떠난 후 실비아도 혼자 노래를 재생한다. 가사 사이의 오르간 연주와 서정적인 멜로디가 마치 이 영화 같다. "어바웃타임"같이 반짝이는 것도 "내 머릿속의 지우개"처럼 비극적인 것도 아니다. 다만 부서진 자들이 서로에게 천천히 스며드는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그러니 이들이 그저 서로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기를 바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