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생의 슬픔을 돌보다 [도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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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시인의 시집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는 다채롭고 무성한 식물의 이미지와 ‘물속의 거주지’라는 환상의 세계를 통해 정황과 정서를 구축한다. 이러한 시집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를 관통하는 정서는 바로 ‘슬픔’이다. 시인은 슬픔을 비롯한 강렬한 감정의 언어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저 물속에 잠긴 것처럼 슬픔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고요하고 잔잔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이 시집은 읽는 내내 물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시집 전체적으로 ‘물속’에는 집과 정원 같은 거주의 형태를 띠는 공간이 등장하고, 이러한 ‘물 안’은 죽음 혹은 화자의 내적 슬픔과 연결성이 있어 보인다. 수면을 기점으로 물속에서는 ‘작약’이 더 환히 빛을 낸다. 이처럼 시집에서 물속은 어딘가 편안하고 계속 머물고 싶은 곳처럼 그려진다. 왜냐하면 그곳은 물에 잠겼다고 표현되더라도 꽃이 피어나고 빛을 내는 오히려 생의 공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물속은 ‘슬픔’의 세계이기도 하다. 이처럼 시인만의 독특하고 환상적인 세계를 담아낸 시집에 대한 나름대로의 감상을 적어볼까 한다.
‘여름’과 ‘물’
“파꽃이 피었으므로 여름은 환상이다”로 시작하는 시 <여름이니까 괜찮아>는 제목처럼 여름이기에 괜찮다는 메시지를 반복해 드러내며 ‘여름’이 화자에게 있어 어떤 시공간적인 존재인지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시에서 ‘여름’은 “아무도 모르게 종점”이고, ‘절망’을 이리도 한가롭게 만들 수 있는 존재다. 또 ‘여름’은 “이해받지 못한 생”이어도 “어때 괜찮아 여름이잖아라고” 말할 수 있고, “끝을 쥐고 있는 이를 만나면” “여름이니까 괜찮”으니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하면 아무데도 가지 말라고” 말해줄 수 있는 시간이다. 이처럼 ‘여름’이라 괜찮다고 이해되는 명목들을 살펴보면 처연한 슬픔이 묻어난다. “이해받지 못한 생”과 “때로 아주 종점이 될까 싶은 마음”이 드는 ‘당신’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지점들은 없음에도 ‘부고’와 ‘종점’이란 단어들이 어딘가 쓸쓸하다.
시에서 ‘여름’은 “여기저기서 온갖 부고들이 날아”드는 계절이다. 이때 죽음에 대한 소식들이 날아들어 옴에도 화자는 “소풍을 가듯 문상을” 가고, “이 생의 모든 부고들이” 어여쁘다고 한다. 이처럼 죽음이 마냥 슬픔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기보다 오히려 어여쁘고 들뜨는 마음처럼 묘사되는 지점이 눈에 띈다. “아주 종점이나 될까 싶은 마음”을 가진 이에게 “어디든 끝에 닿았으니까 아주 행복”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 이러한 화자의 태도는 <식물과 라디오>에서도 비슷하게 찾아볼 수 있다. 화자는 “방안에 물이 가득” 찬 순간에도 그 물속에서 “물결의 흐름을 따라 물풀처럼 조금 흔들”리면서 “난 이런 게 너무 좋아”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화자의 긍정적인 목소리는 오히려 슬픔의 상황에서 인위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정말 화자는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방과 방 사이를 시냇물처럼” 흐르던 “어떤 소리”가 “방안에 물이 가득” 차고 이내 “숨도 가득 차” “혼자 밥 먹던 식탁도 물에 잠겨” 버리는 상황으로 변하게 된다. 그럼 화자는 방이 물에 잠긴 상황을 보고 “난 이런 게 너무 좋아”라며 만족하고 편안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방의 상황은 난장판이지만, 그렇게 엉망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부드럽고 따듯한 물결이 몸을 휘감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받을 수 있다. 화자는 아무도 없으며, 혼자 밥 먹던 식탁이 있는 방에 있던 외로운 인물이다. 이때 움직이지 않던 방은 ‘물’이 가득 차오르면서 움직이는 것들로 가득 차게 된다. 가령 “책꽂이에서 흘러나온 책들” “물고기처럼” 떠다니고, “기린 인형이 천천히 거실을 걸어”가는 것처럼 둥둥 떠가고, “화분에선 고사리들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흔들”거리는 모습이 그렇다. 그 안에서 ‘나’ 또한 “물풀처럼 조금 흔들린다”.
이때 이러한 상황을 ‘좋다’,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화자의 목소리는 어딘가 반어적으로 들린다. 왜냐하면 물의 기저에는 ‘외로움’과 ‘슬픔’이 잠겨 있기 때문이다. ‘라디오’는 아무도 없는 집을 채우던 소리이며, 그러한 소리는 물이 되어 화자의 방을 가득 채운다. 집에서 “어디선가 많이 부딪히며 오는 소리”가 마치 “나에게 하는 말 같아서 귀를 열어”두던 화자는 결국 “내게 한 번도 노래를 불러준 적 없”던 ‘엄마’에 대해 알아버리고 만다. 시속에서 밤과 방과 집이 깊어지고 높이가 사라진다는 것은 수면이 점점 올라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게 화자는 물속에 잠겨가며 “아무도 서로에게 말 걸지 않는” 고요한 슬픔의 세계 안으로 깊어진다. 이처럼 ‘물’을 ‘슬픔’의 세계라 할 수 있다면, 화자를 비롯한 화자 주변을 구성하고 있는 방은 슬픔을 마주하고 그 슬픔의 물결에 따라 물 안에서 흔들리는 것일 테다.
생의 슬픔을 돌보는 마음
시인은 ‘슬픔’을 대하는 것에 있어 적극적으로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한 태도를 취한다기보다 자신의 슬픔을 마주하고 그 현재의 슬픔을 돌보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화자와 슬픔 사이에는 ‘식물’이 있다. 시집은 전체적으로 사람과 식물이 맞닿아있다. “식물들이 안간힘으로 발가락을 밀어올”리고 “당신은 빠진 머리카락을 화단에 심”으며 “나는 (…) 개종한 나무들처럼 잘 차려입”기도 하는 것처럼. 사람으로서의 식물과 식물로서의 사람이 자주 뒤엉키곤 하는 이 세계는 ‘식물’에 담긴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여름이니까 괜찮아>의 첫 문장에서 등장하는 ‘파꽃’은 ‘늙은 플라타너스’의 열매와 유사한 이미지를 갖는다. 이러한 꽃과 열매는 식물의 생애주기 중 번식 직전의 단계에 놓여있다. 꽃이 지면 열매가 맺어지고 열매가 떨어지면 열매 속 씨앗으로 또 다른 생이 맥을 이어간다. ‘종점’은 죽음처럼 보이지만 ‘늙은 플라타너스’를 ‘키운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시는 단절하지 않는 생을 느끼게 하는 면이 있다. 그렇기에 “견디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 테다. 슬픔은 견디는 게 아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다시 맥을 이어가는 것이기에 화자는 “어떠한노력도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일 테다. 우리의 슬픔도 인간 생의 일부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극복하지 않는 대신 시인은 슬픔을 돌본다. 시 <유령에게>를 살펴보자. “다만이제막생기는슬픔만이새로운것이니까” 슬픔은 정형화된 감정도 그렇다고 익숙한 것도 아니라 계속해서 새롭게 생겨나고 있는 듯 보인다. 마치 “여름에 잘라 심은 버드나무에서 연두의 혀가 식구”로 태어나는 것처럼 말이다. 앞서 ‘여름’이 ‘종점’과 연관이 있었던 것을 토대로 “여름에 잘라 심은 버드나무”를 살펴보자. 시인은 이러한 종점을 향해가는 버드나무를 끝자락에 머무르지 않도록 하는 것 같다. 어떤 식물들은 자르거나 떼어낸 뒤 흙에 심으면 그 자리에 다시금 식물이 생명을 갖고 자라나곤 한다. 이때 화자는 이러한 식물 모습을 한 ‘버드나무 아기’ 같은 것들이 “자꾸만 태어나면 어쩌지” 하고 걱정한다. 그러면서도 “손바닥 위에서 꿈틀대는” “여름에 잘라 심은 버드나무에서” 태어난 식구의 생명력을 느낀다. 그리고 그 식구를 위해 생각한다. “슬프다는 말을 데려와 잘 재워주자”고. “여름이 지난 것을 모르도록/ 날마다 안녕이라고 말해주자”고. 이처럼 시인은 그러한 슬픔을 데려와 곁에 두고 잠에 들 때까지 이불을 끌어다 덮어줘야겠다는 마음으로 토닥인다.
이해받지 않음으로써 이해받는 일
시에는 무언가를 ‘하지 않는’ 일들이 많다. 가령 “견디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니까”, “가르침 따위 주지 말자”, “아,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와 같은 구절들. “아무도 서로에게 말 걸지 않”기에 화자는 자신의 쓸모가 그렇게 지워지거나 생겨나고, “훨씬 덜 슬퍼진다”라고 한다. 이처럼 시집 속 몇 시편에서는 슬픔을 공유하거나 이해받으려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슬픔은 슬픔인 채 있다.
<유령에게>에서도 “비가 오면 비를 맞자 밤이 되면 밤을 맞고 벽처럼 서 있어 보자”고, “이제막생기는슬픔만이새로운것이니까설명하지” 말라고 한다. 위로하지 않는 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르면 모르는 상태로, 이해받으려고 하지 않아도 되고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그저 가만히 있는 것.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만큼 좋은 건 없”으며, 그렇게 살다 보면 그럼 자랄 것이고, 잘 될 것이라고 말하는 시.
결국 시에서 드러나는 ‘하지 않음’이란 생의 슬픔을 마주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슬픔을 떨쳐내려 부단히 노력하지 않는 시인의 태도로 이어진다. 그저 “물결의 흐름을 따라 물풀처럼 조금 흔들”리며 슬픔의 세계 안에서 잠긴 채 세상과 사람을 닮은 식물 같은 것들을 바라본다. 시인은 시집 전반적으로 이해하지 않은 채로, 서로를 모른 채로 점점 멀어지고, 그렇다고 끝내 너무 멀어지진 않는 그래도 되는 곳을 계속해서 그린다.
이해하지 않음을 바탕으로 이해하는 일. 이해받지 않음으로써 이해받는 일. 즉 그 슬픔이 정확히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나’의 슬픔을 마주 보고 돌보는 것은 ‘나’이며 그러한 나의 슬픔은 타인에게 이해받지 않아도 되는 개인적인 것이다. 오로지 슬픔을 돌보는 것에 집중하다 보면 슬픔은 어느새 '우리 식구'가 되어 서로의 외로움을 보듬게 될 것이다.
[조유리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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