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이프 같은 날들을 위해
새해가 되어 다이어리를 새로 펼칠 때 가장 먼저 적응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연도를 바꿔 적는 일이다.
달이 바뀌는 것에는 금방 익숙해지는데, 연도는 석 달쯤 지나야 손에 익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하얀 백지 위에 다가올 하루들을 떠올리며 설레는 마음을 담아 다이어리의 등에 작은 주름 하나를 적립해 준다. 올해 이루고 싶은 것, 얻고 싶은 것들을 적다 보니 대부분 조금씩, 자주, 매일 해야 이루어질 것들이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는 세상이란 걸 깨닫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어 이런 소망을 위해 쌓일 하루가 더욱 간절해진다. 그래서일까, 올해는 예년보다 더 진지한 마음으로 첫 장을 적게 된다. 2024년의 마지막이 안개처럼 흐릿하게 보이는 지금, 2025년을 더 감사히, 그리고 더 촘촘히 기억하기 위해, 순간을 음미하며 살아가는 법을 알려준 이 책들을 다시 한번 펼쳐보려 한다.
정원가의 열두 달
저자: 카렐 차페크 / 그림: 요제프 차페크 / 출판사: 펜연필독약
체코를 대표하는 작가 중에는 프란츠 카프카와 밀란 쿤데라, 그리고 카렐 차페크가 있다. ‘로봇(Robot)’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든 사람, 체코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다양한 수식어가 그를 설명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단연 ‘정원가’다.
⟪정원가의 열두 달⟫은 카렐 차페크가 정원에서 보낸 일 년을 기록한 에세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환경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계절을 맞이하는 정원가들의 마음가짐이 담겨 있다.
특히 “가드닝을 하다 보면 인간의 몸이란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모른다”는 구절은 그가 얼마나 정원 일에 진심인지 보여주는 부분이다. 글과 더불어 정원을 함께 가꾼 그의 형 요제프 차페크의 삽화를 보다 보면 정원 속에서 흙과 땀, 자연의 냄새를 느끼게 된다.
어릴 적 고향 집 안방 문을 열면 작은 정글이 펼쳐지곤 했다. 엄마가 분갈이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작은 인형을 들고 화분 사이를 누비며 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내가 사는 집에 식물이 없으면 왠지 허전하다. 물 주는 시기를 놓치거나 온습도를 잘못 맞추면 금세 시들어버리는 식물들을 보살피다 보면 자연스럽게 날씨는 물론 하루의 변화까지도 민감하게 느끼게 된다.
하루를 온전히 느끼며 정원을 가꾸는 순간순간들이 모여 그의 글을 만든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제철 행복
저자: 김신지 / 출판사: 인플루엔셜
SNS를 보다가 "굳이 시간을 내어 무언가를 하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봄이 오면 꽃놀이를 가고, 여름이면 수박 한 통을 사 들고 계곡을 찾으며, 가을에는 전어와 단풍을 즐기고, 겨울에는 방어를 먹는 사람들 말이다. 계절의 변화를 즐길 줄 아는 이들에게는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여유가 느껴진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계절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대문에는 ‘입춘대길’이 붙었고, 식탁 위에는 제철 음식이 올라왔다. 하지만 독립 후에는 출퇴근길의 날씨나 풍경을 통해서야 계절의 변화를 간신히 느낄 뿐이었다.
⟪제철 행복⟫의 저자 김신지는 눈앞에 펼쳐진 계절을 놓치지 않고 즐기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행복해질 기회가 24번이나 주어진다고 한다. 또한 이 행복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계획과 의지가 필요하며, 매년 찾아오는 절기라는 자연의 일정을 따라가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옛사람들이 연중 가장 긴 밤을 지나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를 ‘하늘의 봄’이라 부르고, 그 후 햇볕이 땅에 차곡차곡 쌓인 다음 찾아오는 입춘을 ‘땅의 봄’이라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제철 행복⟫ 25p 발췌
결국,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계절을 인식하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작은 기쁨을 찾는 것 아닐까. 바쁜 일상에서도 계절의 변화를 눈치채고 즐길 여유를 갖는 일은 삶의 균형을 맞추는 힘이 될지도 모른다.
그거 사전
저자: 홍성윤 / 출판사: 북스톤
우리의 일상은 수많은 물건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간다. 하지만 정작 이름을 모르는 물건도 많다. 예를 들어, 피자와 함께 오는 다리가 세 개 달린 그거, 바디로션이 새지 않도록 막아주는 C자형 그거, 배낭에 달린 돼지코 모양의 그거 같은 것들 말이다.
홍성윤의 그거 사전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76개의 물건을 주제로 삼아, 그 이름과 이야기를 알려주는 책이다. 이 책은 단순히 물건의 이름만 알려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물건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우리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사용의 편리함을 넘어서, 그것들이 왜 필요했고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탐구한다. 사소하지만 없으면 불편한 것들에 관한 이야기, 사실 몰라도 되지만 알면 좋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책 속에 담겨있다.
책을 읽으며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지나치는 물건 하나하나에도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작은 행동들에도 다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걸 사소하다고 생각하며 넘겨버리는 순간, 명료한 것이 아닌 ‘그거, 그때’가 될 뿐이라는 걸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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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은 하루하루를 더 감사히, 더 촘촘히 기록해 보자. 눈앞에 스쳐 가는 계절과 물건, 순간들을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일 년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작고 사소한 행복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채우는 가장 소중한 재료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