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하게 말하기에는 주저되지만, 특정 시기에 유독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10대에 눈물 콧물을 흘리며 수없이 본 영화가 더 이상 들지 않고 이전에는 들리지 않던 조언들이 시간을 지나 와닿는 것처럼. 어떤 소설도 그 이야기의 세계관에 쉬이 젖어 드는 시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가 김화진의 이야기들은 세 인생의 한 구간을 내밀하게 서술한다. 사람과 사람이 좋아하면서도 미워하는 그 이상한 감정의 골을 열심히 긁어내어 보여준다. 그의 소설 속에는 주로 20대~30대의 여성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20대 여성인 내게, 비슷한 실수를 하고 열심히 사랑하는 모습은 딱 이 시기에 읽기 좋은, 나의 이야기 같았다.
장편소설 동경에서도 역시 그랬다. 인형 페인팅 수업을 통해 만난 아름, 민아, 해든 세 사람은 선생님과 학생을 지나 동료 혹은 친구로 우정을 이어 나간다. 각자의 변곡점을 만나며 그들은 서로의 우정을 불안해하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하며 그럼에도 ’우리 셋‘과 자신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간다.
사람이 셋인 무리에서, 특히 학창 시절 급식실 앞자리에 아무도 앉지 않는 그 긴장감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앞의 빈자리를 보며 긴장하는 시기는 지나갔지만, 그 나이만의 순수하고 그래서 더 무서운 관계의 솔직함은 늘 기억에 남는다. 물론 어른이 된 지금은 그 긴장보다 세 명의 우정이 얼마나 조화로울 수 있는지 안다. 그 시간들이 남긴 것들 덕에 아름, 민아, 해든의 가까우면서도 먼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소설에서 인상적으로 느껴졌던 부분은 이들이 묘사하는 서로가 본인이 생각하는 자신보다 빛나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소설은 각자의 시점에서 한 장씩 진행되고 아름에게 민아와 해든이, 민아에게 해든과 아름이, 해든에게 아름과 민아가 어떤 사람인지 혹은 어떻게 보이는지 묘사된다. 책을 읽던 중 아름이 말하는 자신과 그들이 말하는 아름이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 소설 속 인물이지만 말해주고 싶었다. 따스하고 잘 표현하며 누군가에게 불쑥 위로를 건네는 그를. 민아와 해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삶을 전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서로를 더 알게 되고 내가 모르는 그의 삶을 조금씩 알아갈 때 느끼는 애틋함이 소설 곳곳 나타난다.
책에서뿐 아니라 우리 인생도 다르지 않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로 살아야 한다지만 개인에게도 타인과의 관계없이는 발견되지 못하는 ‘나’가 있다. 자신을 말하고 해석하기에 있어서 누군가의 시선이 무조건 평가라고도 할 수 없고 그의 관점이 내게는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이해하는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 관계 속에서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 상대적임이 우리의 만남을 더 흥미롭게 만든다. 주인공 세 명 역시 나도 모르는 나를 관계 속에서 찾아가고 서로의 유약한 면을 잘 보듬어준다. 그 모습에서 과거의 나 혹은 우리의 관계를 엿보고 공감할 수 있었다.
완벽한 관계가 어디 있으랴. 모든 걸 받아들이는 관계 또한 있을 수 있을까. 그런데도 왜 우리는 이 관계를 사랑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에 소설 동경은 모두가 겪어봤을 감정적 동요를 보여주며 넌지시 위로를 준다. 서로를 동경하고 좋아하고 살짝은 얄미워하기도 하는 그 복잡함의 묘미가 소설 속에서 생생하다.
소설 속에서 아름은 민아와 해든만의 친밀함을 질투하고. 민아는 아름과 해든의 유대감을, 해든은 아름과 민아의 ‘일로 연결된’ 끈을 부러워한다. 독자 시점에서는 그들이 분명 우정을 이어나갈 것이기에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그들이 질투를 느끼는 순간, 사실 나머지 둘의 관계가 커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종종 순간의 감정을 좇아가게 되기도 하고 불필요한 감정을 내뿜기도 한다. 이들 역시 어엿한 어른이지만 소중한 관계 앞에서 구차해진다는 점이 참 공감되어 웃음이 나왔다.
질투와 애정, 슬픔과 기쁨. 그 종착점은 뭘까. 뻔하지만 역시 사랑이다. 서로가 좋고 셋인 우리가 좋은 마음. 그 뻔한 마음이 결국 마음을 움직인다. 각 인물의 사실적인 모습이 나와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고 소설의 끝에 어떠한 반전이나 대단한 결말은 없이도, 우정이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이 천천히 파동을 낸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와 책 속 인물들이 함께 존재하는 것처럼, 또래의 인간들이 어떻게 관계 맺고 어떻게 못난 마음을 잘 추스르는지, 이상하고 아름다운 순간을 보게 된다.
가까운 친구가 성장하고 조금씩 바뀌는 것을 볼 때에 기쁜 마음을 오랜만에 엿보았다. 다정하기 어려운 세상 속에서도 이런 마음을 느끼게 되는 것, 독서의 순기능이자 이 소설이 할 수 있는 가장 대단한 일이다. 추운 겨울을 함께 보내는 모두에게 소설 '동경'을 통해 따뜻한 우정을 들여다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