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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얼마 전엔 파주엘 또 갔다. 얼마 전이라기에는 거의 한 달 전이긴 하지만서도.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인 커다란 북스테이 숙소에 또 머무르는데, 거긴 실내용 슬리퍼가 주어진다. 일회용처럼 보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된 신발은 또 아니라 왼쪽과 오른쪽의 구분이 없다.


구분이 없다면 어느 것을 어느 쪽 발에 끼워 넣어도 불편함이 없어야 할 텐데, 이상하게도 그것은 어느 것을 어느 쪽 발에 끼워 넣어도 불편했다. 알고 보니 양발 구분이 있던 것인가 싶어 반대로 신어 봐도 여전히, 다름없이 불편했다. 기묘한 방향으로 공명정대한 이 신발을 양발공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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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발공용, 내가 이름 붙여 놓고 이상해서 혹시 같은 뜻을 지닌 제대로 된 단어가 이미 존재하지는 않나 싶어 검색해 봤다. 딱히 나오는 것은 없고 내 구글에 마음대로 침투한 AI 제미니(제미나이?)는 ‘남녀 모두가 착용할 수 있는 양말’이라고 소개하는 걸 보니 아마 양발공용을 공용양말로 이해한 듯하다. AI의 발전 속도가 말도 안 되게 빠르다지만 아직까진 걱정하지 않아도 되나 보다.


양발공용이라는 말은 이상하게 들리지만 사실 대부분의 양말이 양발공용이다. 물론 발목 바깥쪽에만 무늬가 있다거나 해서 좌우가 구분되는 경우는 있겠지만 반대로 신었을 때 불편하지는 않다. 가끔 오래 신은 양말은 닳거나 늘어난 모양새를 보고 이 친구가 어느 쪽 발과 더 살가운지 알 수는 있지만 그게 전부다. 그래서 같은 색의 민무늬 양말을 여러 켤레 사면 빨고 나서 다시 ‘짝지어’ 개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우리는 짝을 전혀 짓고 있지 않다. 짝이란 게 애초에 없거니와 있어도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

 

그런데 또 얼마 전에는 오픈토 요가 양말을 샀다(나도 방금 글을 쓰느라 검색하며 알게 된 건데, 발가락 부분이 뚫려 있는 발가락 양말을 오픈토라고 한다. 그럼 손가락 부분이 뚫린 손가락장갑은 오픈핑거라고 하나 싶어 검색해 보니 정말이었다). 언제나처럼 일반적인 양말, 그러니까 양발공용 양말을 신듯 손에 잡히는 대로 신었는데, 불현듯 이 양말에는 좌우가 정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당연히, 같은 양말을 왼발에 끼우느냐 오른발에 끼우느냐에 따라 엄지발가락이 어디에 오는지가 달라지는데, 또 당연히, 내 엄지발가락과 새끼 발가락은 굵기 차이가 꽤 많이 나기 때문이다. 내 발가락만 그럴 리는 없다. 애초에 새끼발가락은 이름부터 조그맣다. 영어로도 big toe와 little toe로 불린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나는 이 양말을 신을 때 한 번도 좌우를 구분해 신은 적이 없다. 맨눈으로 구분이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고, 일단 구분하려고 해본 적도 없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쏙쏙 신었는데 항상 쏙쏙 잘 맞았다. 그럼 사실 발가락 양말도 양발공용인가? 아마 발가락 전체를 감싸는 진짜 발가락 양말이 아니라 구멍만 뚫리면 되는 오픈토 형식이라 더 수월한 것 같긴 하다. 그래도 이 양말의 신축성이란 대단한 것이구나. 있는 둥 마는 둥 하는 새끼발가락과 꽤나 험악하게 생긴 엄지발가락의 둘레 둘 다 꼭 알맞게 감쌀 줄 알다니. 한 번도 새끼 발가락이 허전한 적이 없었고 엄지 발가락이 답답한 적이 없었다. 똑같이 양발공용이라지만, 저 파주 숙소의 양발공용 슬리퍼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맞지 않는 무용한 친구였고 이 양발공용 발가락 양말은 여기저기 맞는 진정한 육각형 인재인가 보다.


발가락 양말에 관한 고찰을 오래 하지는 않아서 내 생각은 항상 거기에서 그쳤다. 양말을 신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 그러니까 요가 수업을 시작하기 전 발가락을 꼼지락거릴 때까지만 이 생각을 좀 하고, 요가 수업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수업이 끝나고 양말을 벗을 때까지는 저녁으로 뭘 먹을지 생각하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

 

그런데 바로 어제 이것은 내 착각으로 드러났다. 그날도 시작은 여느 날과 다름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오른쪽 양말부터 신고, 왼쪽 양말을 신으려고 했다. 발가락 양말을 신으려면 엄지 발가락부터 구멍에 끼우고 차례차례 옆의 발가락을 무 뽑듯 뽑아줘야 한다. 엄지발가락이 평소와 달리 꼭 낀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일단 다 신고 나서 발 매무새를 가다듬으면 편안한 자리를 찾을 줄 알았다. 그렇게 새끼발가락까지 끼웠는데, 새끼발가락이 휑했다. 매일 터틀넥을 입더니 오늘 갑자기 목이 다 늘어나 버려 잠옷으로 전락한 티셔츠를 입은 것 같았다. 다시 보니 엄지발가락에도 평소보다 푸른 기운이 도는 듯했다.


분명 오른쪽 양말을 왼발에 신었다. 양발공용이 아니었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했다. 오른쪽 양말을 왼발에 신어서 불편하다면, 지금 내 오른발은 왼쪽 양말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오른발도 만만찮게 불편해야 하는데, 오른발은 너무나 평온했다. 불편함이 전혀 없을뿐더러 자세히 살펴봐도 각각의 발가락이 정중한 터틀넥을 잘 갖춰 입고 있었다.


그날은 요가를 하면서 저녁 고민을 할 수 없었다. 오픈토 양말의 비밀을 풀어야 했기 때문이다. 오른쪽 양말만 두 짝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 이 요가 양말에는 발바닥에 미끄럼 방지용 스티커가 붙어 있고, 발등에는 구멍이 뚫려 있기 때문에 양말의 겉과 안, 또는 위아래를 뒤집어 신었을 리는 없다. 정말 오른쪽 양말만 두 짝이 되었는데, 대체 왜?

 

***

 

모든 괴담이 그렇듯이, 발가락 양말 괴담도 허무하게 끝난다. 내 양발에 오른쪽 양말만 두 짝이었던 이유는 너무나 단순하다. 내 집에 왼쪽 양말만 두 짝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빨래와 건조 후에는 이 양말의 짝이 누구인지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그냥 두 장씩 겹쳐 쌍으로 만드는 것에 너무 익숙했기 때문에 오픈토 양말도 그냥 그렇게 했는데, 오른쪽 양말끼리 한 켤레, 왼쪽 양말끼리 한 켤레, 이렇게 총 두 켤레가 완성되고 말았다. 요가 수업 시간 내내 고뇌하다가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갑자기 깨달았다. 실은 이놈도 양발공용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까지 어떻게 오른쪽과 왼쪽을 알맞게 챙겨 입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냥 운이 좋았다거나, 어떠한 직관이 나를 올바른 길로 이끌었다고밖에는 설명되지 않는다.


실은 그 숙소의 양발공용 슬리퍼도 양발공용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곳도 2인실이어서 슬리퍼가 두 켤레 있었는데, 내가 오른쪽 두 짝을, 또는 왼쪽 두 짝을 한 쌍으로 신어서 불편했는지도 모른다. 정말 그렇다면 나는 내 실수, 혹은 방을 정리하고 세팅해 둔 숙소 직원의 실수를 두고 그 슬리퍼가 무용하다 탓한 것일지도. 이게 사실이라면… 나는 슬리퍼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다시 한번 방문해서 직접 확인해야겠다.


그렇다. 이 글은 조만간 또 숙소에 방문하고 싶다는 욕망을 합리화하는 변명의 글이다. 양발공용 같은 건 하등 중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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