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

한국 문학의 좋은 단편을 소개합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aaron-burden-5AiWn2U10cw-unsplash.jpg

 

 

 

클라이파이, 기후소설


 

클라이파이(cli-fi)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올해 9월에 열린 서울국제작가축제 때 이장욱 작가님이 지나가듯 지나가지 않는 여름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 단어를 처음 들었다. 클라이픽션은 기후(climate)와 소설(fiction)의 합성어다. 즉 기후소설이다.


오늘의 소설 이야기에 앞서 기후소설에 관해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임태훈의 평론*에 따르면 이 말은 ‘2013년 4월을 기점으로 영미 문학계와 저널리즘을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했’(149)**다고 한다. 이는 온실가스 배출 감축을 약속한 유엔 변화기후협약(교토의정서와 파리협정)에 불참한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기후 위기 대응을 둘러싼 혼란’(150)이 한몫한다.

 

 

 

교토의정서와 파리협정


 

교토의정서는 1997년 12월 교토에서 개최된 유엔 기후변화협약 제3차 당사국총회에서 최종적으로 채택된 선진국 온실가스 감축 이행 방안이다. 2008~2012년까지의 1차 공약기간에는 각국 의회의 승인을 받은 터라 법적 구속력을 가졌음에도 전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28%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은 2001년 자국의 산업보호를 위해 탈퇴했다.


2013~2020년까지의 2차 공약기간에는 각국 정부 차원의 약속으로 법적 구속력이 없는 것이었고, 미국을 비롯한 러시아, 일본, 캐나다, 등 전 세계 배출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주요 국가들이 불참했다. 


그러나 2012년에 미국에 불어닥친 사상 최대 규모의 허리케인 샌디로 일주일 간 84조 원의 피해액을 입은 오바마 정부가 기후 위기 해결을 최우선 국정 과제로 삼으며 협약 추진을 주도했고 2015년, 교토의정서의 후속 협약인 '파리협정'이 체결된다. 이는 2020~2030년까지를 다루는 협약이자, 선진국에만 의무 적용되던 교토의정서와 달리 당사국 모두가 감축 목표를 지켜야 하는 보다 강력한 협약이었다.


그러나 2017년 들어선 트럼프 정부는 이 협약을 탈퇴했다. 2021년 바이든 행정부가 취임하며 파리협정에 재가입했지만, 올해 다시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재탈퇴 여부가 주목되고 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해서 작성

 

 

chris-leboutillier-c7RWVGL8lPA-unsplash.jpg

 

 

 

한국문학의 기후소설?


 

그러면서 영미 문학계에 ‘2010년대 기후 위기를 창작 주제이자 핵심 세계관으로 채택한 신진작가’(149-150)의 작품이 등장했다(파올로 바치갈루피의 『와인드업 걸』). 이러한 '기후 소설이 한국문학에서 실체가 있는 유효한 경향으로 분석되려면 영미 문학계에서처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수준 이상의 성취가 있어야 할 것'(151)이며 그래서 '한국문학에서 기후 소설을 말하는 일에 대해 냉소적인 이들의 생각'도 존재할 것이다. '지금 단계에서 기후 소설을 왈가왈부하는 것'은 서두르는 감이 있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러나 평론가는 ‘기후는 국경이나 국가를 모르기 때문’(151)에 한국문학계에서도 기후소설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기후는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나타나는 기후 문제


 

이런 말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다. 잔인하게 말해 ‘기후 위기의 직접적이고 궤멸적인 피해’(152)는 주로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도서 국가들’이 겪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그들이 겪는 재난을 보면서, 위험과 무서움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영화 속 장면 같다고 느낄 따름이다. 미디어는 그런 영화 같은 재난의 현장과 더불어 유럽의 어딘가, 미국의 어딘가, 일본의 어딘가를 아름다운 낙원으로 비춘다. 그러니 더더욱 실감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것이 전부 한 세계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각자의 세계에 충실하면 된다는 식으로 느긋’(151)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농촌 지역의 수해는 장마 때 으레 일어나는 일처럼 여겨지지만 최근엔 강남이 물이 잠겼고, 도심의 터널과 아파트 지하주차장이 침수되어 사람이 죽기까지 했다. 또 지난 여름을 기억해 보라. 10월까지 기승을 부린 더위, 그러다 급작스레 찾아온 추위와 이례적으로 많이 내린 첫눈, 눈의 무게에 축 처진 노란 은행나무까지.

 

지구는 정말로 변하고 있고, 우리가 ‘지구 위’의 인간인 게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유능한 동물이라 이 문제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인간은 포괄할 수 있는 시간성이 ‘고작 이백여 년 안팎이거나 멀리 거슬러올라가도 천 년에 미치지 못한다.’ 그런 인간이 만든 ‘현단계 자본주의의 최종 진화형인 국제 금융 시스템조차 완전한 통제가 불가능한 초객체’(151)가 되어버렸는데, 과연 기후는 통제가 될까?

 

이런 기분은 코로나 때도 느꼈던 것 같다. 그 기괴한 첫 뉴스가 아직도 선명하다. 국내에서도 확진자가 생겨나고 대구의 신천지 교회를 중심으로 대유행, 그 후에는 확진자의 동선이 낱낱이 공개되던 흐름도. 그전에도 신종플루며 메르스며 감염병은 있었지만 코로나처럼 대유행했던 건 없었다.


그전까지는 재난이 SF영화처럼 픽션적으로 온다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재난이 오는 방식은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재난은 보편적이고 사회적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문화가 확산되어 초연결성은 극대화되었고, 인터넷 소외 계층은 더더욱 외면당했다. 플랫폼이 성행했고 대면 문화, 상권은 기가 죽었다. 재난은 외부로부터 왔다기보다는 내부에서 솟아난 것처럼, 스며들어 자리를 잡았다. 내 집에 내가 손님으로 온 것처럼. 세계는 모습을 바꿔놓고서도 원래 그랬던 것처럼 태연하게 굴었고, 외래 나는 내가 낯설어졌다.

 

 

 

인간 중심성에서 벗어나기


 

그러나 이조차도 평론가가 지적했듯 ‘인간 중심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느꼈던 인간사회에 대한 감각일지도 모른다. 사실 소설이 그러하다. 소설은 ‘인간의 문화적 형식이며 일반적으로 인간의 경험만을 기준으로 삼’(157)는다. ‘상품성 있는 소재와 주제를 중심으로 활성화’(153)되는 ‘자본주의의 서사’(156)이며, ‘자신을 지칭하는 일인칭의 굴레에 쪼그라든 채 비인간을 인간의 자리 바깥으로 내밀거나 소거한다’(153).

 

애초에 인간이 만들었기에 인간의 것인데, 그 점이 ‘기후소설’을 시작하는 것조차 혼란에 빠지게 한다. 기후는 자연적인 것, 인간보다 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후 위기의 심각성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사유와 성찰을 담아내는 데 문학은 유용’(152)하다. 특히 소설은 ‘기후변화의 규모와 복잡성, 그 철학적, 물리적 의미를 인식하도록’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대혼란의 한복판에서 우리가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154)를 재차 생각하는 것이 ‘기후소설의 역사적 과업’인 걸지도 모른다.

 

 

 

재난 극복 서사의 한계


 

임태훈 평론가는 기후소설의 방향성을 위해 먼저 기후소설과 유사한 ‘재난’ 소설들, ‘재난 극복의 서사’(식민지 시기의 서사)를 분석하고 그 한계를 제시한다. 재난 극복의 서사는 그 과정에서 ‘근대성 획득’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일컬어지거나 국가가 ‘자연재해로부터 인민을 구하는 궁의 주체라는 신화’(156)라는 메시지가 재생산되고, ‘지배체제를 향한 저항 의식과 계급적 각성이 모색’되어도 여전히 국가가 이 ‘피해 복구에 결정적 역량을 발휘해야 할 주체’라고 호명하고, 결국 국가를 대리해 ‘극복에 이바지한 영웅’을 추앙한다.

 

모두 자연에서 일어난 문제이지만 ‘극복이 가능하다’는 전제가 깔린 건데, 이는 ‘K-재난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나는 한계다.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한겨레출판, 2024)에서 사회학자 조형근이 지적한 것처럼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 ‘스즈메의 문단속’ 같은 영화도 이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영화 속에서 재난은 잠재워야 할 적처럼 구성되고, 재난을 미리 감지한 인물들은 재난을 막으려고 분투하고 연대한다. 영화는 그 재난, 비극이 이 어떻게 해결되는가에 집중하는 나머지 정작 그게 왜 일어났는가에 대해선 사회구조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 자리는 신화적인 상상력이 보충할 뿐이다.

 

 

li-an-lim-ycW4YxhrWHM-unsplash.jpg

 

 

 

기후소설을 쓰려면


 

재난 극복 서사에 반해 기후소설은 ‘비인간을 포함한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사고와 자연과의 비지배적 관계를 추구한다’(157)는 차이를 가진다. 그를 위해선 ‘객체 지향 서사’(153), ‘미래의 비/인간형을 발명하는 일’(154)이 필요하다. ‘지역적이고 주관적인 것을 경험하는 동시에 추상적이고 전 지구적인 힘을 포착하고, 비인간을 포함한 복잡한 시공간과 규모와 다양한 관점을 묘사’(158)해야 한다.


굉장히 거시적이고 거창한 목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는 기후 문제를 접할 때마다 느꼈던 막연함과 무력감과 비슷하다. 내가 지켜봤자 뭐 해.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이는 문제의 규모에 압도당한 나머지 자신의 고유한 사고, 성찰, 문제해결 능력이 애초에 박탈되었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심리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있어선 연대할 수 있다고 믿고, 또 그 연대의 결과를 보았으면서도 불구하고 기후문제에 있어서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거라고 애초부터 무력감을 느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는 기후소설을 고민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마주하는 감정일 것이다. 기후소설은 성찰을 요하는 소설이지 해결 방안을 알려주는 논문이 아니다. 소설은 언어이기에, 기후소설은 언어로서 기후 문제를 성찰할 방법을 유도해야 한다. 평론가는 ‘인간 중심성을 걷어낸 환경’, ‘비인간적인 요소인 환경’에 초점을 맞춰 ‘새로운 이름’을 붙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생태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시적 언어의 창안이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즉 인간에서 벗어나는 상상력과 새로운 언어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결국 이 ‘행성적인’ 기후 문제에 문학이 할 수 있는 최선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후소설


 

이런 기후소설의 과업에 관해 한국문학의 성취 사례들-기후 소재의 소설들, 비극적 사건과 공명하는 가상의 상황(김애란 「물속 골리앗」(2010)), 기상적 자아의 계보(『일곱 가지 색깔로 내리는 비』(2011)), 지구적인 스케일과 행성적인 것의 차원에서 SF의 과감한 시도(『미세먼지』(2019)), 재난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기후 위기 비판(박해울 「요람행성」(2021), 김기창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2021)), 과학적 해결책으로 파국을 막고 더 나은 문명을 재건하려는 인간 중심주의의 좌표를 수정한 서사(김초엽 『지구 끝의 온실』(2021)), 호모사피엔스의 신체와 정신을 최후까지 해체하는 서사(김청귤 『해저도시 타코야키』(2023))-이 거론된다.

 

 

 

기후소설의 가능성


 

그러나 앞서 말한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기후변화에 관해서 설명하고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주는 ‘이상적인 이야기’(160)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할 수가 없다. ‘절대적 관념으로 설명하기엔 너무나 방대하고 이질적’(160)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순간, 그것은 메시지를 설파하는 납작한 소설이 될 확률이 높다.


임태훈은 ‘복잡성을 복잡성 그 자체로 받아들’(160)인 채로, 기후소설에 관해 ‘알고 있는 것들의 매트릭스를 맴돌며’ ‘매트릭스 자체를 문제삼아야 한다’고 한다. ‘이 안에 아직 없는’ 것이 무엇이고 그 새로운 걸 ‘생성해내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며, 그걸 막는 게 있다면 어떻게 맞설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민의 ‘전환’으로 기후소설이 ‘새로운 비/인간형의 사회를 향한 혁명적 정서를 생성하는 정치 예술’이 될 수 있다고 표명한다.

 

 

 

현실에 기반한 디테일


 

비평 이야기를 장황하게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이해의 바탕에서 이 소설을 살펴봐야 다르게 또 새롭게 읽힐 수 있어서 소개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기후소설을 알았으니, 소설 「내일의 날씨」***이야기로 들어가보자.

 

한국의 자랑이었던 사계절의 뚜렷함은 모호성, 극단성으로 치닫고 있다. 겨울과 여름이 영향력을 강화하는 가운데, 봄과 가을은 찰나처럼 지나가버리고 있다. 서고운 작가의 「내일의 날씨」는 근미래, 한국에 환경부 산하 기후변화대응센터가 생긴 시점의 이야기다. ‘화영’은 ‘기후변화대응센터의 인천 지부 소속 9급 공무원’(292)으로, 천공의 성처럼 떠 있는 비행선 본부에서 일하고 싶어서 ‘성과급이 높고 고과 평가도 잘 받을 수 있’어 ‘부서 이동이나 승진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가는 강화도 남서 방향에 놓인 ‘해상기후관리 서해 제3분소’에 반년째 근무하고 있다. 거기서 화영은 과학고를 졸업하고 기후공학을 전공, 대학 조기 졸업, 미국 연구소에서 일하다 스물여섯의 나이에 7급 경력직으로 센터에 채용된 엘리트 ‘수미’와 같이 일한다.


수미가 상관이지만, 수미는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 화영을 ‘선배’라고 부르면서 따른다. ‘기후변화대응센터 본부로 곧바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303)인 7급을 몇 년간 준비했지만 낙방했고 결국 9급에 응시해 합격한 화영이 보기에 수미는, ‘비건식’(294)이 제공되고 ‘여가 시간이 넉넉’해서 이곳에 왔다는 수미는 ‘별다른 생각 없이’(296), ‘무엇이든 절실한 게 없어 보이는’(297) 상태로 이곳에서 지내는 사람 같다. ‘수미는, 수미다. 나는 나고.’(297)라고 화영은 생각하면서도 은근히 부러운 건 어쩔 수 없다.


화영과 수미는 해상에 설치된 ‘자그마한 선박’(292)에 가까운 형태의 분소에서 근무하며 ‘해저 수온 상승 억제하는 냉각장치가 제대로 가동하는지, 인공 구름의 모양과 흐름은 어떠한지, 강수량이 목표치에 맞는지, 기후 관리 시설 제반에 전원을 공급하는 무인 발전선에 이상은 없는지’(292) 점검한다.


일이 지루하나 ‘지루한 만큼 휴게 시간이 넉넉(292)’하게 부여된다. 해마다 본부로 ‘부서 이동을 신청했고 그때마다 반려당’(296)한 화영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본부에 ‘해외 협력 업무가 많’다는 얘기를 듣고 남는 시간에 ‘영어, 독일어, 힌디어까지 닥치는 대로 배우’는 반면, 수미는 ‘책을 읽거나’(294) 수첩에 글을 쓴다. 그런 수미는 화영에게 ‘기후공학 전공자가 더 필요’(296)하다는 이유로 본부로 가게 될 거라는 소식을 전한다.


이 소설을 읽으며 놀란 건 기후변화대응센터라는 거대하고 어쩌면 거리감이 느껴질 수 있는 설정이 인물들의 지금 현실에 기반한 디테일을 통해 코로나가 그랬듯 우리의 현실에 스며들 듯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처음엔 동시대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너무나 현실적이고 지금으로서도 충분히 가능할 이야기처럼 여겨져서다. 공무원이라는 설정과 엘리트에게서 느끼는 미묘한 무력감도 그렇지만 특히나 ‘두세 대의 항공기가 구름씨뿌리기를 해서 구름 입자를 결집하도록 만’(293)들어 인공설을 만들지만 인공 구름 해체에 실패해서 폭설로 조난되는 그들의 위기 상황은 두바이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두바이의 폭우


 

동아사이언스의 기사 <1년 치 비 한꺼번에 쏟아진 두바이… 인공 강우 탓?>에 따르면 올해 4월 사막 기후인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12시간 동안 100mm의 폭우가 쏟아졌다. 이는 평소 두바이에서 1년 동안 관측 가능한 양이라고 한다. 전례 없는 폭우에 침수 피해가 컸고 사람들의 대피 사태가 일어났다. 이에 관해 전문가들이 ‘구름 씨앗’ 때문이 아니냐는 추측을 제기했다. 두바이에서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비가 내리도록 만드는 물질인 ‘구름 씨앗’을 살포했기 때문이다.

 

 

연합뉴스 제공.jpg

 

 

이는 「내일의 날씨」의 인공설이 내리도록 구름씨뿌리기를 하는 설정과 상당히 유사하다. 물론 두바이 폭우의 원인이 구름 씨앗 때문이라기보다는 ‘전 세계적인 기후변화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더 클 거라는 지적이 나오긴 했다. 또한 ‘폭우에 대비한 기반 시설이 부족해’서 피해가 컸다는 이유도 언급됐다. 그러나 기후 문제를 기술이 예측하고 예방하기 어렵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임은 확실하다. 비가 내리지 않는 지역에서 비 내리는 기술을 만들었는데 기후가 비를 쏟고 간 것이기 때문이다. 기술이 기후를 바로잡아야 하는데 기후에 따라 잡힌 거라고도 볼 수 있다.


「내일의 날씨」에서는 그와 좀 다른 양상으로, 기후를 통제하려던 기술이 실패하는 사례가 나타난다. 놀라운 건 두바이의 폭우(2024년 봄)보다 이 소설이 먼저 발표(2023년 가을)되었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도 이 소설은 정확한 기후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기후변화대응센터의 건립에 관한 잡음


 

앞에서 임태훈의 평론과 조형근의 글을 빌려 재난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고 지적한 사항, 재난의 사회구조적인 원인이 이 소설에서는 정확히 등장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원인은 지금 우리가 놓인 상황을 핍진하게 보여주는 것도 같다.

 

 
각국의 연구자가 모여 기나긴 회의를 했다. 그들은 삼천쪽 분량의 보고서에서 감염병의 원인으로 기후 위기를 지목했다. (…) 이내 새로운 기후 협약이 체결되었고, 여러 국가가 첨단 기술을 앞세워 휘황찬란한 기후 위기 대응 전략을 내놓았다. 한국 정부가 내놓은 것이 바로 기후변화대응센터였다. 본부와 플랫폼, 해저 시설, 각 지역 기지와 분소, 그리고 이 모든 시설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발전선까지 포함하여 사십조원가량의 예산이 드는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297-298)
 


계속해서 생겨나는 감염병의 대응방안으로 한국이 내세운 기후변화대응센터에도 비판은 존재했다.

 

 
어떤 이들은 극렬히 반대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계획이라며 정부 청사 앞에서 페인트를 뿌리고 불을 피웠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반대 행진을 하고 구호를 외치고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했다. 이윤을 위한 개발은 정의로울 수 없다, 생산과 소비를 보호하는 기후 정책을 폐기하라, 불평등한 지구는 지속 불가능하다, 그런 말들을 외쳤다. 뉴스에는 그 모습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나 조롱거리가 되다가 금세 묻혔고 센터는 계획대로 건설되었다. (302-303)
 

 

 

시스템과 개인


 

그들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기후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게 마땅하다. 그러나 국가의 주도로 세워지고 말았다. 코로나 때문에 돌잔치를 하지 못했고 그 뒤로도 계속해서 나타나는 바이러스로 입학식도 수학여행도 대면수업도 할머니와의 이별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성장한 화영, ‘살면서 놓쳐버린 게 참 많’(297)아 ‘무언가를 떠나보내지 않으’려고 ‘무언가를 지키려고 애를 쓰는 일에 익숙해져’버린 화영은 기후변화대응센터의 본부를 ‘천공의 성’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서 ‘사라지는 것들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298)은 꿈을 품고 자랐다. 그런 화영은 지금 이 ‘열다섯 시간째 눈이 내리’(293)는 폭설의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갖고 있다. 자신이 속한 체계, 기후변화대응센터가 자신을 지켜줄 거라고 말이다.

 

 

정말 조난이 가능할까. 화영은 눈발 너머 어딘가를 응시해보려고 노력하며 잠시 고민했다.

불가능하다.

화영의 미간이 풀어졌다. 그래,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몽땅 조난당해도 나는 안 당한다. 나는 메커니즘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이니까. 화영이 불안할 때마다 외우는 주문이었다. 화영은 스스로를 톱니바퀴처럼 만드는 데 열중해왔다. 인생에서 카오스를 하나하나 제거해나가면 오직 규칙만이 남고 규칙만이 있는 세상에서는 망할 일도, 상처받을 일도 없다 (293-294)

 

 

그러나 사라지는 걸 지킬 수 있을까. 세상은 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화영이 좋아하던 꽃게는 이미 ‘멸종선고’(295)가 돼버렸고, 꿈에서 거대 괴물로 나타날 뿐이다. 눈은 여전히 내린다. 갑판에 ‘허리춤까지’ 눈이 쌓인다. 모니터엔 강설량이 ‘목표치의 서른여섯 배를 넘어가고 있’(298)다고 떠 있다. 그리고 메시지가 온다.


 
인공 구름 해체 실패로 폭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직원들은 비상 매뉴얼에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299)
 

 

그러나 매뉴얼에 없는 상황들이 펼쳐진다. 본부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발전선에선 신호가 없고 냉각기는 멈춘다. 그동안 수온은 올라갈 것이며, 발전소의 비축된 에너지도 얼마 없어 소진되면 난방도 멈춘다. 그들에게 위기가 닥치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세 선택이 남는다. ‘구조되거나, 탈출하거나, 가라앉는’(299) 것. ‘폭설로 인한 긴급 대피령 발령. 산간 지역 주민들은 대피소로 이동’하라는 메시지와, ‘직원들은 비상 매뉴얼에 따라 대기 요망’이라는 메시지, 상반되는 메시지의 아이러니함 그 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분소가 가라앉지 않게 눈을 치우는 것이다.

 

 

jason-dent-5VnI90YqrTE-unsplash.jpg

 

 

 

겨울에 떠올리는 여름


 

갑판의 눈을 어느 정도 치운 그들은 사무실로 돌아와 모니터를 보며 상황을 지켜본다. 수미가 무전을 붙잡는 동안 화영은 ‘세상은 망할 리 없다는 것을, 망하는 사람만 있다는 것을 몰랐’(301)던 어린 시절, 세상 아니면 자신이 끝장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던 여름을 떠올린다. 아주 끈적하고 지독한 여름을. 폭염으로 ‘아스팔트가 너무 뜨거워져서 뒤틀리는 바람에 다 삭아가던 파이프가 터져’(302)버려 단수가 된 어느 밤 집에 있던 엄마가 열사병 증세로 쓰러져서 물을 구하려고 빈 페트병을 들고 동네의 작은 산 약수터에 뛰어올라갔던 이야기를 수미에게 말한다. 그때 무전에서 신호가 온다.

 

 
수미가 무전기를 들고 응답한다. 해상기후관리 서해 제3분소 이수미 주무관입니다. 무전기에서는 긴 한숨과 함께, 실패입니다,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실패? 무엇에 실패했다는 것일까, 애가 타는 사이 정적만이 흘렀다. (302)
 

 

실패가 시스템에 의해 선언되는 순간, 시스템의 결속력은 그 순간 해체되고 시스템의 결속력에 의지하던 직원들은 개인이 된다. 개인으로서 자신을 지켜야 한다.


화영이 따뜻해 보이는 걸 찾기 위해 침실로 향했을 때, 우연히 보게 된 수미의 수첩 메모에는 그날그날의 날씨와 기분이 적혀 있었다. ‘업무 일지’나 ‘기후공학과 관련된 아이디어’(303) 스케치도 아닌 ‘일상의 기록’(304)이었던 것이다. ‘구조 작전권이 공군으로 넘어가’ ‘전투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을 전하려 침실에 들어온 수미는 화영이 일기를 본 것에 상관하지 않고 이야기를 마저 해달라고 한다. 화영은 허겁지겁 약수터에 올라가서 본 말라붙은 우물과 거기를 뛰쳐나온 개, ‘제 몸집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핑크색 개 이야기를 해준다.


 

“정말로요. 제가 지금까지 상상해왔던 세계 종말은 그런 색이었어요. 장밋빛에 가까운, 어쩌면 피칠갑을 한 듯 진한 핑크색. 이렇게 적막한 순백일 줄은 몰랐죠.” (304-305)

 

 

그때 화영이 느꼈던 절망감은 다채로운 색깔로 기억에 각인되었다. 그건 내가 픽션적으로 상상했던 재난의 형상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릴 적 그 한여름의 열기 속에서 느꼈던 화영의 감정과 그때 본 기이한 색의 개는 화영에게 종말을 그런 모습일 거라고 상상하게 했다. 그러나 그건 틀렸다. 그때 세상은 망하지 않았으며 망하는 사람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이모가 엄마에게 물을 가져다주어 엄마가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폭설의 상황, 분소가 가라앉을지도 모르는 ‘순백’의 상황에서 정말로 망하는 게 뭔지 화영은 차차 실감하고 있었다. 재앙은 시끄럽고 다채롭기보다는 조용했다.

 

 

 

놓쳐버림과 잃어버림


 

화영의 토로한 조용한 절망감에 수미는 자신의 이야기로 대답한다.


 

“선배, 저는 어릴 때부터 뭘 많이 잃어버리고 살았어요.”

수미는 그래서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했다.

“잃어버린 물건이나 사람은 되찾기 어렵지만, 그래도 잊지 않는 일은 내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거잖아요.” (305)

 

 

별생각 없이 능력만으로 수월하게 살아가는 줄만 알았던 수미의 내면, 본부로 부서 이동하게 되었음에도 기뻐하기보다는 “잘되긴요, 정들었는데.”(296)라고 말했던 수미의 내면이 드러난다. 수미의 메모 습관은 취직이 잘된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두 군데밖에 없는 기후공학과에 간 뒤로 데모를 하게 된 것과 이어진다.

 

 

“그래서 갔는데 저 같은 사람들이 또 있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요?”

“잃어버리는 걸 쉽게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 그래서 무력해지기 쉬운 사람들이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취직을 뒤로하고 집회 현장을 쫓아다닌 것도 그 이유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화영은 그 마음을 알 듯했다. 상실을 이겨내기 위해, 사라지는 것들을 기억하려는 노력. 무력감을 이겨내기 위해, 함께 드러눕는 일. 화영은 햄스터를 생각했다. 꽃게도 생각했다. 잃은 게 참 많았다. (306)

 

 

화영의 놓쳐버림과 수미의 잃어버림이 연결된다. 어떤 놓쳐버림은 잃어버림과 같았고, 어떤 잃어버림은 놓쳐버린 것이기도 했다. 그러다 망각면, 잊히면 그때는 정말로 끝나버리는 거였다. 그걸 견딜 수 없어서 수미는 메모를 했고 데모를 했으며, 화영은 ‘사라지는 것들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여기서 만났다.

 

 

 

하루라는 낱알


 

그런 수미가 데모를 그만둔 건 여전한 무서움, 무력감 때문이었다.

 

 

“무서웠어요.”

“뭐가요?”

“내가 너무…… 아무것도 못하는 것 같아서.” (306)

 

 

나아지는 게 보이지 않을 때, 가늠이 되지 않을 때 두려움은 무력감으로, 포기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수미는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메모를 하고 있다. 일상의 기록을 남기면서 그 일상을 잊지 않으려고 여전히 글 속에서 데모를 하고 있었다. 수첩의 글은 화영에게 오랜만에 일상을 보았다는 느낌을 전해준다. 그건 귀한 감정이다. 계속해서 꿈에서 좌절을 맛본 화영, 그래서 삶이 단이 높은 계단처럼 여겨졌을 화영에게 수미의 글은 삶이란 일상이라고, 여전한 것들이 비슷한 듯 다르고 다른 듯 비슷하게 이어지고 이어진다는 것을 전달해 주었다. 수미에게 일상이 그렇게 계속 이어질 수 있었던 건 무엇 때문일까. 거기서 찾아낼 수 있는 낱알 같은 희망은 무엇일까.


 

“있잖아요.”

“네.”

“만약 지구가 오늘 망한대도, 그게 어제가 아니라 오늘인 건 주무관님 덕분일 수도 있어요.”

“네?”

“그때 주무관님이 길바닥에 드러눕지 않았으면 버섯전골도 못 먹고 끝났을지도 모른다고요.” (307)

 

 

수미가 품은 낱알 같은 희망은 ‘하루’라는 낱알 그 자체, 그날에 했던 그 일 자체였다. 부담스럽지 않은 하루라는 몫을 수미는 기록했던 것이다. 전에는 몸으로, 이제는 글로. 할 수 있는 만큼, 오래도록. 그날의 내가 지금의 나를 도왔다는 그런 마음으로, 화영과 수미는 빗자루를 잡고 눈을 쓴다. ‘동쪽 하늘 아주 높은 곳에서 붉은빛이 피어오’(307)르며 무너지는 본부의 서울 플랫폼을 ‘불꽃놀이를 보듯’ ‘와아, 하고 탄성을 뱉’으며 본다. ‘서쪽 수평선’에서 ‘마치 구름이 끓어오르는 듯’ 다가오는 무언가를 “꽃게 모양 같지 않아요?”라고 상상하면서, 다가오는 종말 앞에서 그들은 그렇게 아무 걱정 없이 눈을 쓴다.

 

 

 

우리와 '가까운' 기후소설


 

멸망을 축제를 보는 듯 대하는 그들의 행동에서 절망에 삼켜지지 않는 결연한 마음이 느껴진다. 그런 마음이야말로 기후소설에서 말했던 비/인간형의 발명 같기도 하다. 인간은 절망으로 기울기 쉽기 때문이다.


앞선 비평의 마지막 장에서 임태훈은 이렇게 말한다. 


 

기후 소설을 쓰고 읽게 만드는 유력한 추동력인 종말론적 시나리오와 표상들도 시효가 거의 다했다. 기후 소설이 장차 SF와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면 다름 아닌 이 이유 때문일 것이다. (161)

 

 

개인적으론 SF가 과감한 시도는 가능할지라도 기후소설에서 요청되는 ‘현실감’을 주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과감하고 새로운 시도로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킬 순 있겠지만, 시대며 설정이 너무나 지금과 다르다면, 그 책을 펼칠 때만 유효한 이야기처럼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SF가 아닌 영역의 기후소설은 뭐가 있냐는 질문이 있을 수도 있겠다. 앞서 임태훈의 비평에서 언급된 소설 중에도 그 답이 충분히 있겠지만, 나는 이번 소설도 그 답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현실에 밀착하고 있는 상상력과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 거리감을 가지고 있어서 읽으면서 놀라고 많은 걸 느꼈다. 이런 게 가능하구나.


물론 이 소설을 두고 이상적인 소설이라고 단언할 순 없다. 누군가는 ‘인간 중심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로서는, 소설에서 인간의 감각으로 연대하고 인간이 비인간에게 가하는 폭력을 찾아내 비판하며, 비인간을 포함하는 폭넓은 사유의 기착지를 향해 일단 달려가는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이 그 시작점에 놓일 소설 중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작이 많으면 많을수록 목적지에 다가가기 수월할 거라고도.

 

 

*임태훈. (2023). [특집] ‘기후 소설Cli-fi’을 어떻게 읽고 쓸 것인가?. 문학동네, 30(3), 148-161.

** 이하 괄호는 쪽수표기

***서고운. (2023). [소설] 내일의 날씨. 문학동네, 30(3), 291-307.

 

 

 

에디터 안태준.jpg

 

 

안태준이 에디터의 다른 글 보기
쓰는 동안 나는 거기 있을 수 있다.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