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의 하드보일드 문체적 특성과, 그 특유의 허무주의를 가장 잘 드러내는 짧은 중편 소설이다. 주인공 산티아고는 청새치와 일생일대의 사투를 벌이지만, 그의 태도에서는 청새치에 대한 소년과도 같은 순수한 애정이 엿보인다.
1.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노인과 바다』
제목에서 명시했듯 그는 노인이나, 나는 그가 여전히 어린 소년 같다고 느꼈다. 바닷바람 같은 세월에도 긍지와 자부심을 품고 때 묻지 않은 애정을 품을 수 있는 사람. 어린아이의 순수를 사람들이 찬양하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산티아고가 나이 들고 힘없는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삶을 기꺼이 저버릴 용기를 걸고 청새치와 싸우는 모든 순간은 그 누구보다 고결하다.
그러나 그가 사랑했던 바다는 잔인하게 노인의 승리를 해체하여 빼앗아간다. 사실 이 작품의 진미는 그가 쟁취한 승리를 산산조각 내버리는 결말에 있다.
산티아고의 승리의 증거인 청새치는 상어들에 의해 처참히 뜯겨나간다. 그가 마을로 돌아갈 때까지 청새치는 낱낱이 뜯겨 뼈만 남게 되고, 산티아고는 고기에게 죄책감까지 느끼며 괴로워한다.
차라리 대결하지 않았다면 청새치는 그런 수모를 겪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결말이 나에겐 그렇게까지 허무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삶은 허무하고,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저명한 사실이 더 이상 새롭지 않아서이다.
단순히 산티아고가 그토록 순수하게 부딪쳐 볼 순간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애틋하고 부럽기까지 했다. 멋진 문장을 모두 잘라가며 이 소설을 썼다는 헤밍웨이와 그 결과인 이 소설은 그가 추구하였던 삶의 결과 닮아있다.
극한으로 절제되어 있고 담백한, 필요한 문장과 서사로만 압축된 소설. 그렇기에 더 아름답다.
2. 물성을 잃은 현대사회
인간은 패배하려고 태어난 건 아니야. 인간은 죽을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 않아. (75p)
이 문장을 읽고 나와 정확히 정반대되는 정념을 가진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진짜 감각이나 진짜 경험은 뭘까. 짧은 삶을 살아오면서 물성 자체를 실감해 본 감각은 전무하다. 이것은 나뿐만이 느끼는 감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아가 다 자라기도 전에 온라인이라는 세계에 발 걸친 채, 남이 느꼈던 것, 느껴왔던 것을 언어와 텍스트 전면으로 듣고 자라온 사람들. 앎과 깨달음은 너무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알고 있는 것, 곧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깨닫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접 몸으로 부딪쳐 깨달아본 순간, 알고 있음과 깨달음은 너무 다르다는 걸, 그 사실을 절절히 깨닫는다.
삶에 대한 모든 것들을 우린 이미 알고 있다. 누군가의 이야기, 누군가의 삶, 누군가의 실패와 성공, 회한과 후회를 학습해왔다.
“우린 지금 책을 너무 많이 읽어 현명하지 못하고 생각이 너무 많아 아름다워질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네. 자네라고 예외일 순 없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썼다. 이 소설은 이미 19세기에 쓰인 소설이지만, 현재 21세기에 와서 더 마음에 와닿는 문구인 것 같다. 전시된 타인의 삶을 엿보고 모방해 온 탓에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현대인의 초상. 그런 현대인이 가장 강력하게 실감해 본 물성이란, 허무일지도 모른다.
한 번이라도 치열하게 무언가를 갈망해 보고, 부딪쳐 보고 깨져 본 적이 있나? 살아있음을 실감해본 적이 있나? 나는 없다. 그런 이상 또한 허상이래도 할 말은 없다. 단 한 순간이라도, 물성을 믿고 존재하고 싶으니까. 그렇기에 헤밍웨이가 재현하고자 한 산티아고라는 이상적인 인간상이 사랑스럽고, 헤밍웨이가 존경스럽다.
3. 그 뒷 이야기
한치의 거리낌도 없이, 본질과 본질 그 자체로 청새치와 맞대어 겨루는 자세. 비록 삶이란 투쟁이 승리도 패배도 안겨주지 않는다는 결말이라 하더라도. 그 자체로 너무나 충분한 의미로 느껴졌다. 그가 마지막까지 사자의 꿈을 꾸듯이.
이 이야기의 원본 모델이었던 푸엔테스는 헤밍웨이가 이 이야기를 쓰게 해준 대가로 2만 달러를 받았음에도 거절했다가, 기어이 쥐여주는 헤밍웨이에 그 돈을 고작 30년 동안 썼던 낡은 배를 바꾸는 데 썼다. 헤밍웨이가 엽총으로 자살했다는 부고를 들은 후, 푸엔테스는 바꾼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한가운데에서 울었다고 한다. 이 모든 내러티브까지 이 소설의 완성처럼 느껴졌다.
말만을 내세우기보다는, 그저 본질에 육체로 부딪쳐 투쟁하는 가장 순수한 인간과 이를 재현하고자 해냈던 헤밍웨이. 자꾸만 누군가 떠오른다. 바다 같은 허무를 체감하면서도 끝까지 싸우며 패배하지 않으려 한. 그럴 수 있는 용맹함에 감히 부럽다고 적는다. 우매하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