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사랑 문법에 대한 우아한 조소 - 트렁크

글 입력 2024.12.10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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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려령 작가를 처음 알게 한 작품은 <내 가슴에 해마가 산다>이다. 당시 학생이던 나에게 ‘부모도 자식이 크는 것에 슬픔을 느낄 수 있다’는 깨달음은 완전히 처음 접하는 생각이었다. 아마 이때부터 좋아하는 책을 여러 번 읽는 습관이 생겼을 것이다. <내 가슴에 해마가 산다>를 읽은 횟수는 두 자릿수가 되었고, 김려령 작가는 내 학창 시절을 수놓은 최애 작가가 되었다.


이후 <완득이>, <우아한 거짓말>,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가시고백> 등이 출판될 때마다 읽었다. 특히 <우아한 거짓말>은 살면서 가장 여러 번 회독한 소설이다. 한때는 책의 표현을 줄줄 외웠다. 이후 <너를 봤어>를 읽으며 김려령 작가의 청소년 시리즈가 아닌 어른을 위한 책을 처음 접했다. 그리고 진짜 어른이 된 지금, 또 다른 어른을 위한 소설 <트렁크>를 읽었다.

 

 


기동력 있는 문체


 

<트렁크>는 주인공 인지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된다. 상황이나 상대방에 대한 묘사보다 인지가 느끼는 감정선을 따라 스토리가 흘러간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인지의 시니컬함이다. 기본적으로 시원시원하다. 막 페이지가 두 자릿수에 접어들 무렵 인지는 기간제 남편과 잠자리를 가지는데, 이 상황에 대한 묘사가 인지의 성격을 확실히 드러낸다.


 

열심인 건 알겠는데, 하는 건지 마는 건지…… (중략)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하니까 하나보다 하는 이 맥빠진 움직임은 뭔가. 여하튼 굿바이. 행복하길.

 

p11

 

 

이 짧은 문장들을 통해 노인지라는 사람을 빠른 시간에 파악할 수 있었다. 으레 흥분에 차 있을 상황에서도 이성적인 사고를 유지하며, 자칫 차갑거나 무미건조해 보일수도 있는 텐션을 유지한다는 점, 쿨하게 ‘여하튼 굿바이’를 말할 수 있다는 점, 그럼에도 ‘행복하길’이 덧붙는 걸 보며 천성 자체가 무심하거나 냉정한 사람은 아님이 느껴지는.


인지의 주위 사람으로 이야기가 뻗어갈 때는 문체가 더 시원시원하다. 옆집 할머니 얘기를 할 때는 ‘독신 노인의 성욕을 책임져라! 젊은 오빠는 상상 속 섹스파트너다’라며 우리가 흔히 작품에서 접했던 이웃 노인의 캐릭터와 다른 색깔을 집약적으로 나타낸다. 할머니의 돈을 쏙쏙 뽑아 먹는 젊은 가수는 주로 ‘젊은 오빠 새끼’, ‘개새끼’로 칭한다. 매일 바가지 씌워 물건 파는 사람을 생각할 때 욕을 안 섞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 얼마나 솔직한가.


결혼정보회사의 VIP 회원들에게 직접 기간제 부인인 FW(field wife)가 되어주는 비밀 자회사 NM(new marriage)가 있다는 흥미로운 설정을 배경으로, 하나같이 적당히 베일에 쌓여 있으면서도 독특한 인지의 주변 캐릭터들을 통해 속도감 있는 전개가 펼쳐진다. 심지어 주인공 인지조차 잘 알 수 없지만 매력적인 캐릭터로 서술되며, 책의 몰입도가 높아진다.


 

 

사랑의 부조리함에 대한 우아한 고찰


 

사랑에 상처 한 번 안 받아 본 사람 있을까. 결국,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모든 캐릭터를 하나하나 회고해 보자면 주인공들은 인생의 나이테에 사랑이라는 큰 생채기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으레 하는 사랑과 이별의 과정에서 겪는 상처보다 한 뼘 더 크고 한 뼘 더 깊어서, 다른 사랑으로 덮이지 않고 평생 살아있는 흉터를 간직한 채 살아야 하는.


동시에 김려령 작가는 이런 사랑의 상처를 이용하는 폭력도 보여준다. 인지의 스토커 엄태성은 노력과 마음이 담겨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직접 만든 떡케이크를 선물이랍시고 굳이 가져오고, 인지의 동의 없이 사생활에 찾아온 것이 가장 위협임에도 위협적이지 않은 말투로 인지에게 다가선다. 상대방에게는 가장 섬뜩한 폭력을 저지르면서 폭력적이지 않게 보이는 방식. 사랑의 상처라고 느낄 수 있게끔 상대방과 주위를 속여 행하는 더 큰 폭력.


 

“여보, 나는 왜 저 남자만 보면 화가 날까?”

 

“당연하지. 먼저 일어나서 죄송합니다. 시간이 안 되네요, 미안합니다. 죄송한데 나가주세요. 자꾸 사과하게 만들었잖아. 자기가 툭 쳐놓고 사과받는 사람이야. 사과와 거절이 얼마나 무거운 건데. 생큐, 오케이,하고는 질이 달라. 사람을 푹 꺼지게 해. 진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상대가 구질구질하게 사과할 상황을 만들면 안 돼.”

 

p204

 

 

피해자가 오히려 사과하게 만드는 아이러니. 가해를 하고도 사과를 불러일으키는 폭력적인 방식과 부조리함. 김려령 작가는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가장 순수한 면의 부조리함과, 그것과 경계에 있다고 착각되지만 사실 양극단에 위치해있는 무례로 점철되어 있는 사회의 부조리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결국 이 사회 속 사랑과 관련된 폭력과 부조리함에 대해 다면적이고도 기품 있는 고찰인 것이다.


더 나아가면 결혼제도의 부조리함과 상처 역시 엿볼 수 있다. 작품 속에는 소위 오래오래 함께 행복하게 산다는 ‘성공한’ 결혼생활을 이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옆집 할머니는 제대로 된 결혼생활을 향유해본 적 없고, 인지의 기간제 남편인 정원은 이혼 후 기간제 결혼을 택했고, 시정은 아무리 사랑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 주인공 인지 역시 가족의 개입이 불가피한 결혼제도에서 큰 아픔과 상처를 겪었다. 누군가는 사랑의 결실이자 매듭이라고 보는 결혼제도의 부조리함과 폭력성을 우아하게 이야기한다.


 

 

2024년의 <트렁크>


 

<트렁크>가 발간된 2015년 이후 9년만에 <트렁크>는 다시 세상에 드러났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8부작 드라마가 나왔고, 개정판이 발간되었으며, 미국·영국·중국 등 해외 6개국에 번역 수출이 되었다. 사랑의 폭력과 결혼제도의 부조리함이라니. 2024년의 트렌드에 부합하는 작품이자, 시대를 앞서나간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드라마도 러프하게 시청했다. 사실, 이미 주인공 배우의 캐스팅을 알고 책을 읽었던 터라, 읽으며 적지 않게 놀랐다. 원작 캐릭터의 개성과 배우의 개성을 매치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라마를 보며 완전히 납득했다. 드라마의 각색은 캐릭터와 배우를 하나로 보이게 했고, 스토리 라인 역시 원작의 모호함을 더 살리며 주제 의식을 더 강화했다. 앞서 말한, 결혼제도에서 큰 상처와 아픔을 가진 사람들 간의 연대 역시 더욱 돋보였다.


작품 속 트렁크는 많은 것을 상징한다. 파란만장한 다섯번의 결혼생활을 거쳐온 누군가의 청춘 그 자체이기도 하고,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극단의 도피처이기도 하며, 또 원하지 않는 현실에 안주하려던 나약한 마음이기도 하다. 소설 속에서는 결코 끝나지 않을 마지막을 암시하기도 하고, 드라마에서는 베일에 쌓인 NM과 인지의 존재, 그리고 비밀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이런 사랑, 모두 꺼내어 볕에 널고 싶다.

누구라도 보송보송 잘 마른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

사랑 때문에 우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p197

 

 

하지만 공통적으로, 트렁크 안에 담긴 것은 보편이라는 얄팍한 범주에 속박되고 싶지 않다는 자유로운 결단과 예리한 통찰, 무엇보다도 포근한 사랑이다. 우리는 늘 사랑의 부조리함, 폭력, 실패를 딛고도 또다시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걸으니까.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도 다시는 꺼내보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버릴 수 없어 청춘을 담은 채 굳게 잠근 트렁크 하나쯤 있을 것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트렁크>를 향유하며, 트렁크의 견고한 자물쇠를 풀어나가는 시간을 가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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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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