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곳곳에 놓인 디오라마는 커튼콜 뒤에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다. 주인공 최영우가 그토록 타고 싶어 했던 서울행 기차가 있는 남원역, 자카르타로 포로 감시원들을 실어 나르던 함선과 그들이 감시하던 포로들이 묻힌 무덤, 전쟁 범죄자로 기소되어 구금되었던 수용소와 마침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던 날의 기차역까지.
공연은 일제강점기 시기와 현재를 번갈아 가며 재현한다. 그리고 그 재현이 끝나도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모형들은 지나간 현실을 기록한 르포르타주처럼 한 조선인 청년의 삶을 끝까지 기록한다.

두 개의 시선이 그리는 과거와 현재
배우가 무대 위에서 연기를 펼침과 동시에 스크린 위로 상영되는 라이브 필름.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는 라이브 필름 퍼포먼스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극을 전개한다. 잔뜩 지친 배우의 표정을 클로즈업했다가 실제 포로 감시원들의 이동 경로가 표시된 지도를 비추는 카메라. 화면은 영화와 같이, 혹은 할아버지의 육필 원고를 읽는 작가 최양현의 머릿속을 그려내는 듯 계속해서 그 시선을 옮긴다.
배우의 훌륭한 연기에서 화면으로 자꾸만 시선을 빼앗기는 것이 흠이라면 흠일 정도로 연출이 흥미롭다. 기차가 출발할 때 기차역 디오라마에 놓인 기차의 번쩍임을 카메라로 담는다든지 십자가를 꽂으며 포로들의 죽음을 표현하는 연출이 그렇다. 무대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표현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들도 눈에 띈다. 포로들과 포로 감시원들을 무대의 중앙에 두고 무대의 한쪽 끝과 다른 쪽 끝에 놓인 나팔과 그림자로 형상화된 채찍질을 번갈아 가며 카메라로 비춰준다.
카메라는 과거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려주는 길라잡이 역할을 함과 동시에 연극을 폭넓게 볼 수 있는 렌즈가 되어준다.

라이브 필름 퍼포먼스는 비단 기능성을 위해 채택된 형식은 아니다. 카메라는 과거의 시선이요, 배우들의 연기를 감상하는 관객의 눈동자는 현재의 시선이다.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며 조선과 대한민국이 교차한다. 현재의 시선을 통해 과거 인물의 선택을 감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과거를 시각적으로 축소해 놓은 디오라마는 수많은 기록물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르포'라고도 불리는 르포르타주는 현실에 대해 주관을 섞지 않고 현장감을 살려 객관적으로 서술된 글을 말한다. 공연의 내용을 이루는 동명의 책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도 르포르타주이다.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가 원고를 남기지 않았다면 그의 손자 이경현은 그 내용을 영영 알지 못했을 것이다. 르포문학은 감상적이지 않다. 감정보다는 사실에 집중하여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기록하는 것을 중점으로 둔다. 민감한 소재라고 하여 아무도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면 후대에는 그 사실이 존재했다는 것조차 모를 것이기에. 그것이 기록의 힘이다.
르포르타주는 글을 통해, 라이브필름 퍼포먼스는 공연을 통해 기록을 전달한다. 기록물의 한계는 진짜 그 시절을 경험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눈앞에서 펼쳐지는 연극은 그 경계를 허문다. 관객은 따라서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경험하게 되며 그 공간 안과 밖에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수단이 기록이라면 그 주체는 바로 관객이다. 기록물을 읽고 과거를 잊지 않는 존재. 현실을 기록하는 르포르타주도, 과거를 담아내는 공연도 그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이를 소비하는 현재의, 그리고 미래의 관객이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역사라는 난폭한 파도 속 흔들리는 작은 돛단배

극의 시작에는 배우와 무용수가 한 명씩 나온다. 정면을 응시하며 앉아 있는 최영우 역의 김세환 배우의 얼굴 위로 색색의 조명이 비춘다. 불빛들은 파도처럼 흔들리며 청년의 얼굴을 스쳐 지나간다. 그것은 역사가 개인에게 남기는 상흔을, 그 속에서 고뇌하는 개인을 그려낸다. 그리고 그 뒤에서 곡선을 그리며 춤을 추는 무용수의 불안한 움직임은 역사라는 난폭한 파도 속 흔들리는 작은 돛단배의 움직임을 연상시킨다. 결국 이 극은 거대한 흐름 속에 내던져진 한 개인이 어떻게 떠밀려갔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어쩌면 그는, 역사라는 난폭한 파도 속 흔들리는 작은 돛단배였는지도 모른다."] -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
개인의 의지가 아니었다고 마냥 옹호할 수도, 왜 파도에 맞서 싸우지 않았느냐고 마냥 비판할 수도 없다. 이는 이미 1923년생, 그 시절 20살이던 한 청년이 이미 한 차례 고뇌했던 바일 것이다. 일본인에게는 조선인으로, 또 전범재판에서는 일본 이름으로 불리며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였던 최영우. 그는 갖은 고초 끝에 기적적으로 고향으로 생환한다. 그 과정에서 그가 한 선택들은 이렇게 남아 우리에게 전해진다.
역사의 풍랑 앞에서 어떤 궤적을 남길 것인가. 혼란스러운 시국 속 훗날 기록될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하는 이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