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 많은 은수는 어디로 갔나* - 오정희, 바람의 넋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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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볼 수 없이 무너진 거리, 전쟁의 포격으로 인적 하나 없이 텅 비고 죽어버린 거리를 아이는 무심한 얼굴로 걷는 다. 아이는 걷다가 가끔 무언가 뒤를 끌어당기는 것, 안타깝게 부르는 소리를 들은 듯 뒤돌아보지만 역시 아무도 없 다. 아이는 자기가 가야 할 곳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떠나온 곳도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가냘픈 생명 속에 깃들인 무 서운 본능이 이끄는 대로, 끊일 듯 끊일 듯 한가닥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기억의 끈을 찾아 한 걸음씩 옮겨놓는 것이다.
하얗고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 줄곧 땀이 흘러내리는데도 자꾸만 춥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를 아이는 알지 못한 다. 다만 길을 자꾸자꾸 걷노라면 기억의 끝머리쯤에서 작은 목조 이층집이 나타나더랬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 빈집의 무성히 자란 잡초 속에서 날아오는 흰나비 한마리 팔랑이며 앞서 날고 아이는 그것 을 잡으려는 손짓으로 잠깐 두 팔을 내다가 다시 걷는다.
오라, 나의 어린 넋이여, 바람 되어 떠노는 넋이여, 하염없는 그리움 잠재우고 이제는 돌아와.
- 오정희, 「바람의 넋」 결말 부.
「바람의 넋」에 등장하는 최은수라는 인물은 남편 지세중이 심인란에 올리기 위해 적은 묘사에 따르면, 키 158cm, 여윈 체격의 쇼트커트 머리형의 여성이다. 물론 그는 이 단순한 묘사만으로 축약할 수 없는 인물이다. 살아온 생이 생략된 채 심인란에 실린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바람의 넋」은 전쟁고아 출신의 아내가 자꾸 가출을 감행하는 탓에 남편과의 결혼 생활이 파탄나고 가정이 붕괴되는 전개의 중편 소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 최은수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는 전쟁의 아픔과, 정상 가정에 편입되고자, 가부장적 질서에 순응하고자 했으나 실패한 여성의 개인적 면면, 그로 인해 생성된 ‘은수’라는 인물의 자기정체성과 존재의 심연을 깊이 탐구해볼 수 있다.
1. 오정희와 바람의 넋
오정희의 「바람의 넋」은 1982년에 발표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으로, 특히 1970~80년대 여성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개인성과 내면성을 강렬하게 드러낸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이 작품은 단순히 개인적 서사에 머무르지 않고, 6.25 전쟁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아픔과 상실감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여성주의 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작품은 1, 3장은 은수의 남편 지세중을 초점 화자로, 2, 4장은 주인공 최은수를 초점화자로 전개된다.
그러나 “아내는 초점화자로 설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목소리로 가출 욕망의 근본적인 원인을 설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은수의 가출은 그녀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와는 반대로 1장과 3장은 남편을 1인칭 화자로 하여 서술되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남편의 입장에서 아내의 가출 사건을 바라보도록 유도된다.**”
4장의 결말 부에 이르기까지 독자는 은수의 내면과 심리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남편인 지세중은 나름대로 은수와 아들 승일에게 헌신적이고, 성실한 은행원이며, 계속해 가출을 감행하는 은수를 질책하여 결국 이혼까지 하나 한편으로는 그가 돌아오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지세중이 완벽하게 가정에 충실하고 선한 인물이라고는 할 수 있다. 그의 모든 행동은 가부장적인 권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은수와 이혼한 이유 또한 은수가 계속해 그의 가부장적인 권위를 깨부수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2. 은수의 가출
그냥 어떻게 이렇게 평생을 사나, 사는 게 이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해요.
- 오정희, 「바람의 넋」 201쪽
은수의 가출은 단순한 일탈 행위는 아니다. 은수는 가출의 이유를 설명했으나, 이는 지세중과 독자 모두 설득시키지 못했다. 그것은 은수 자신조차도 그 기원을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은수는 자기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는 입양되기 전의 기억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으며, 어릴 적 사촌으로부터 자신이 고아 출신임을 알게 된다.
그의 양부모는 은수가 고아 출신임을 알지 못하도록 친딸처럼 키워왔으나, 그를 둘러싼 주위 환경으로부터 철저히 유리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후 은수는 “얼굴에 손톱자국이 가실 날 없던 사나운” 성격에서 온순하고 말이 적은 성격으로 변하게 된다. 은수는 미술대학을 나오고, 평범한 은행원인 지세중과 결혼까지 하게 되며 그야말로 평범한 ‘정상궤도’의 삶을 산다.
그러나 은수의 무의식 속 억눌린 ‘내 자신이 누구인지,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는 메시지는 은수가 그 어느 곳에서도 편안할 수 없게 한다. 어디든 자신의 집이라고 느낄 수 없는 그는, ‘집’이라고 약속된 공간 안에서 더 불안을 느낀다.
그렇기에 은수는 아무리 편안한 생활이 지속되고, 세중에게 다시는 그렇지 않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참지 못하고 집을 나가게 된다. ‘집’이라고 명시된 공간조차 은수라는 인물을 완전히 받아주진 않는다.
가출을 명목 하에 바깥에 나와 있으면, 은수의 실존은 긍정되며, 증명된다.
3. 은수의 실존 증명
은수가 이토록 자기 자신으로부터 괴리를 느끼는 이유는, 어릴 적 내재된 트라우마 속에 있다. 은수는 계속해 자신의 기원에 대해 끝없는 갈증을 느껴오며 고통스러워 한다.
이는 프로이트의 사후성 개념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후일 은수는 늦은 시간 홀로 밖에 나와 있다가 윤간을 당하게 된다. 그 끔찍한 사건으로부터 왠지 은수는 무의식 속 잠든 기억의 실마리를 잡게 된다. 바로 “하얗게 햇빛이 쏟아지는 마당에 나뒹굴고 있던 두 짝의 작은 검정 고무신(211쪽)”이었다.
이 기억은 은수가 기억하지 못하는 5살 전의 기억으로, 결말 부에서 그 충격적인 전말이 밝혀진다. 은수는 6.25 전쟁의 여파에서 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물로, 가족이 몰살된 충격 때문인지 그 전의 기억은 무의식 속에 파묻힌 상태였다.
그러나 윤간이라는 충격적인 경험은 이전의 기억까지 상기시키며, 그 이전의 기억과 사건을 은수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임에도 그 경험의 의미를 재구성, 재해석하게 만든다.
은수는 그 트라우마적인 기억을 필사적으로 잊기 위해 노력해 온 동시에, 그 공백에 대해 끊임없는 갈증을 느끼며 사투를 벌여온 것이다.
이렇듯 오정희의 「바람의 넋」은 단지 은수라는 인물의 개인적인 실존에 그치는 것이 아닌, 가부장제 질서의 모순과 실상을 리얼리즘의 문체로 보여주며, 그 질서에 순응하고자 했지만 실패한 여성의 상과, 나아가 한국의 역사적 슬픔인 6.25 전쟁에까지 연결하며 그 상처를 반추한다.
유튜브 KBS TV문학관에서 오정희의 「바람의 넋」을 실사화한 단편 드라마 또한 볼 수 있다. 고 김자옥, 김종결 주연 작이다.
* 박완서 저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제목 차용.
** 심진경. (2015). 원초적 장면과 여성적 글쓰기의 기원. 인문학논총, 37, 379-398.
[양예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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