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유도 아니고 은유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 약을 먹으면서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고 있다.
우울과 불안장애 약의 적응 기간이 무사히 지났다. 본격적인 치료를 위해 약의 용량을 늘렸다. 의사가 몇 번이나 위장장애에 대해 물어봤는데 그런 건 없고 자꾸 졸려서 아침 약을 밤에 먹고 잔다고 했더니 새로 받은 약봉지에는 아침 대신 취침 전이라고 찍혀있었다. 밤마다 알람을 맞춰놓고 까먹지 않고 먹고 있다.
불안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원래 시작은 병원에서 준 마음 일기 양식이었는데 거기서 맘에 든 게 시간대를 정해서 일기를 쓰되, 불안한 마음이 들면 일기를 쓰기로 한 시간에 불안해하기로 하고 당장의 불안을 벗어나라는 부분이었다. 온종일 불안에 젖어있지 않기 위해서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내 상황에 대해 비교적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늘 비슷한 이야기를 적으니 어떠한 상황과 감정에 매몰되어 있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상비약으로 극단의 불안을 눌렀을 때가 시작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상 극복을 위한 첫걸음은 이때였다.
전보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증상을 보고, 약의 도움을 받기 시작하니까 이성도 챙길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불안에 빠지기 전에 한 번씩 상황을 짚어봤다. 이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나는 약을 먹고 진정할 필요가 있다. 예전처럼 통제할 수 없는 불안 속에서 몸부림 치지 않을 수 있다는 현실이 나를 회피에서 한 걸음 멀어지게 했다.
예를 들면 회사에서 어쩌다 떠맡은 업무가 있다. 히스토리를 살펴보는데 정말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담당자가 되어있었다. 잘 알지도 못하고 까다로운 일이라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메일을 보내고 난 다음 날이면 '회신 안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시차를 핑계로 업무를 오후로 미루곤 했다. 지금도 여전히 하기 싫다. 그래도 이제는 한다. 불안이 질척하게 따라붙더라도 수렁에 빠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되니까 일단 시작한다. 일을 하더라도 마음가짐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너무너무 하기 싫지만 전처럼 큰 영향을 주지는 않게 되었으니까.
물론 약 좀 먹었다고 드라마틱한 결과가 나오지는 않는다. 그래서 아직도 나에게 불안은 고여있는 감정이다. 종종 찾아오는 우울이나 무기력은 '이러다 지나갈 것'이라며 못 본 척 넘기려고 하지만 병적인 불안은 아니다. 처음엔 불안이 뒤에서 쫓아오다가 걸어오는 정도만 바랐고, 약의 효과를 보기 시작할 때만 해도 좋았는데 사람이 참 간사하다고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 약이 해결해 줬으면 좋겠다는 요행을 바란다. 혼자서 처리할 수 없는 일이라 도움을 찾았고, 약의 보조를 받아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한 번씩 힘들어서 지칠 때가 있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심각한 불안은 호흡 몇 번 한다고 나아지지 않는다. 무뎌지지도 않는다. 증상만 말하자면 '이대로는 못 살겠다.' 싶은 정도를 벗어났을 뿐이다. 다만, 불안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왜 불안을 느끼는지, 언제 불안을 느끼는지, 어떤 행동을 하고 생각을 하는지. 불안에 쫓기던 경주마 상태에서 벗어나서 좌우를 살핀다. 어디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생각한다. 사실 불안과의 이별은 나 자신과 제대로 된 조우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는 걸 치료 한 달 반이 된 시점에서 깨달았다.
불안한 삶은 쉽지 않고 현재의 내 상황에서 이런 불안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떨쳐내려고 애써야 하는지 아직 방향을 잡지 못했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앞으로 이 감정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지는 못하겠다. 고여있는 불안과의 이별을 시작해 보려 한다.
여전히 불안하고 우울하고 무기력하지만, 자꾸 달라붙는 것들을 떨쳐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