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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시를 들으며 하나의 팔레트를 완성했다.

날씨가 추워지며 손이 시려서, 종이가 추위를 머금어 아주 차갑게 느껴져서, 그래서 귀로 듣는 시를 선택했다. 단지 그 뿐이었다.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녹음된 낭독을 들으며 글씨가 색채로 변하는 신기하고도 귀한 경험을 했다.

아래는 시집 <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에서 가장 마음에 든 두 편의 시를 듣고 작성한 감상이다. 본 글에서 '감각으로 만드는 팔레트'와 '나가며'에 첨부된 이미지는 시를 듣고 직접 만든 색채 이미지이다. 이 시를 감상하는 다른 독자들은 또 다른 저마다의 팔레트를 만들 것이다.
 
 

감각으로 만드는 팔레트


 

이 시집의 낭독자는 가수였다. 7명의 멤버가 돌아가면서 2편 가량의 시를 낭독하고 그에 대한 감상을 녹음했다. 이 중 <음악은 당신을 듣다가 우는 일이 잦았다>와 <캐치볼>은 유난히 내게 강렬한 색채를 떠오르게 했다.


SIDE A의 <음악은 당신을 듣다가 우는 일이 잦았다>에서는 전반적으로 쓸쓸하고 고독한 분위기가 크게 드러났다. 낭독자의 목소리는 비교적 낮은 편이어서, 이미 첫 구절부터 이 시의 쓸쓸한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거기에 감정을 듬뿍 담은 한 인간의 목소리는 더 이상 단순한 글 읽기가 아닌 하나의 가창이었다. 시는 노래와 같다는 말이 비로소 이해되었다.

 

한 이름을 흥얼거리다 보면 다 지나가는 이 새벽

당신의 이름을 길게 발음하면 세상의 모든 음악이 된다.

 

- 이현호, <음악은 당신을 듣다가 우는 일이 잦았다> 中

 

 
특히 낭독자는 시에서 ‘영원히’나 ‘길게’라는 단어를 다른 단어보다 좀 더 길게 읽는다. 단어의 의미를 살리면서 섬세한 부분까지 신경 쓴 낭독은 인공지능의 낭독과는 분명히 달랐다. 또 단어 사이사이를 끊어 읽는 정도가 모두 다르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인간적으로 느껴지고, 깊은 여운을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열쇠라는 점이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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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창밖’이라는 단어로 시작해서 ‘우리는 음악을 울린다’라는 구절로 끝난다. 그 사이에서는 ‘불태운 관’과 ‘심장박동’, ‘사랑’이라는 붉은 색채를, ‘새벽’과 ‘울음’이라는 푸른 색채를 떠올리게 한다. 그 색채들이 한데 어우러져 쓸쓸함과 고독한 분위기가 증폭된다. 다만 ‘음악’이라는 단어에서는 약간의 따뜻함을 느꼈다. 시의 구절 그대로를 본다면 음악은 울고 있는 주체이지만 사실은 화자가 음악을 통해 눈물을 흘리며 약간의 위로를 받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SIDE B의 낭독자는 위 낭독자와 다른 사람이었다. 비교적 높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특징인 이 낭독자는 <캐치볼>이라는 시를 그 만의 방식으로 낭독한다. 그의 목소리는 ‘캐치볼’이라는 단어가 가진 활동적인 느낌에 상당히 어울렸다. 특히 <캐치볼>에서는 ‘ㅇ’ 이나 'ㄹ' 발음이 상당히 많이 반복되는데, 낭독자가 가진 음색은 이 발음을 더욱 생동감 있게 표현한다. ‘입’, ‘입술’, ‘알사탕’, ‘농담’처럼 계속해서 이응이나 리을이 들어가는 발음에서 낭독자의 독특한 발성은 더욱 빛을 발한다.

 

네 입술은 잘 길든 글러브 같아 잘 던지고 잘 받는다.

알사탕같이 농담을 굴리며, 입을 가리고 웃는다.

 

- 이현호, <캐치볼> 中

 

 
시의 구절들을 읽어 내려갈수록 캐치볼과 알사탕의 이미지 사이에서 저녁과 겨울이라는 춥고 쓸쓸한 감각이 느껴진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구절에서는 화자의 좌절과 기대의 교차가 느껴진다. SIDE A의 <음악은 당신을 듣다가 우는 일이 잦았다>가 전반적으로 고독한 분위기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SIDE B의 <캐치볼>은 통통 튀는 단어들 사이에서 묘한 고독과 그리움이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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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캐치볼’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가 강해 자연히 초록색 잔디밭에서 실제 캐치볼을 하는 두 인물의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다. 그러다 ‘알사탕’에서는 형형색색의 동그란 사탕의 이미지가, ‘입’과 ‘농담’에서는 사랑하는 대상에 해당하는 인간의 형상이 떠올랐다. 그 뒤로 ‘저녁’과 ‘겨울’에서 비로소 뿌옇고 채도가 낮은 색감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손과 눈에서 멀어진 글자들은 머릿속에서 새로운 감각을 끌어냈다. 목소리와 단어가 주는 감각에 집중하여 색깔과 이미지를 떠올리면 어느새 나만의 팔레트가 완성되어 있었다. 내가 아닌 다른 독자들은 또 다른 색감과 이미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저마다의 팔레트가 궁금해졌다.
 
 

고독하면서 따뜻한 인간

 

만약 이 시집을 눈으로만 읽었다면 나는 두 작품을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으로 선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청각으로 느끼는 시는 나에게 또 다른 새로운 감각들을 꺼냈다. 그러면서 시인이 말하는 ‘고독’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고독함을 어떻게 소화하고 또 해소하는가? 모두가 외딴섬에서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늘 사람을 마주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외롭고 고독한 것일까? 특히 추운 겨울이 되면 우리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몸을 웅크리고 과거를 돌아보며 고독이라는 우물에 깊게 빠지고 만다.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간은 필연적으로 외롭고 고독할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도, 함께 있지 않아도, 매일 같이 사람을 만나도, 이 사회에서 한 사람으로 존재하는 이상 우리는 고독의 시기를 겪을 수밖에 없다. 사람은 차고 넘치지만 내 안의 가장 따뜻한 공간을 교류할 수 있는 존재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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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은 매일 그 고독을 끈질기게 버텨내면서 쓴 일기장 같다. 상실의 대상은 사람일 수도,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대상이 아니라 마음이다. 시의 화자들은 모두 ‘혼자’의 상황에 있고 그들은 각자의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동시에 은은하고 따뜻한 온기도 가지고 있다. 평생을 고독 속에 살지만, 그 잠깐의 온기를 나누기 위해 어떠한 대상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두 편의 시는 모두 사랑하는 대상이 곁에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고독한 분위기를 그리고 있지만 그 안에 묘한 따뜻함이 느껴졌다. ‘음악’이나 ‘농담’ 같은 단어 때문일 수도, 아니면 낭독자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여운 때문일 수도 있겠다. 어떤 이유에서건 낭독을 들으며 느꼈던 그 작은 따뜻함이 누군가에 위로가 되지는 않을까 생각한다.

 
 
나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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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목소리로 시를 들으며 인간은 완전한 푸른색일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낭독자의 목소리에도, 시의 단어 사이사이에도 인간이 가진 고유한 따뜻함이 늘 존재하고 있었다. 막막하고 짙은 어둠의 겨울을 견뎌내면 다시 따뜻한 봄이 오듯이, 우리는 분명 따듯한 온기를 나눌 수 있는 또 다른 존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또 시를 듣고 색채 이미지를 만들어본 경험은 정말 독특하고 새로웠다. 시를 해석하는 방법이라고는 오로지 학교에 다니며 배웠던 ‘교과서적 방식’뿐이었던 내게 이 방법은 새로운 감상의 방법을 찾게 해주었다. 더불어 목소리를 들으며 ‘고독’이라는 주제에 대해 곱씹으면서 추운 겨울을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기기도 했다. 시를 새롭게 감상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방법을 추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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