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과 차별, 시공간을 넘는 논의
SF소설 속 가상 세계는 오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우리가 닿은 적 없는 세계이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묘한 기시감이 든다. 지금의 현실과 맞닿아 있는 설정들 때문이다.
'달의 뒷면을 걷다'에서도 마치 현실과의 평행우주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소설 속 주인공은 달에서 태어난 '월인', 다이다. 2070년대, 지구인은 지구를 넘어 달까지 본격적으로 개척하기 시작한다. 지구에선 보이지 않는 달 뒷면에서 각종 자원과 광물을 캐고, 안전한 달 기지를 구축하기 위한 연구를 지속한다. 이렇게 달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며 자연스럽게 달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기도 했다.
달에서 태어난 월인은 한때 인류의 희망이라 불렸지만, 머지않아 달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월인을 달에 묶는 족쇄가 된다. 지구 중력의 1/6인 달 중력에서 태어난 월인 아이들이 가족과 함께 지구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고중력 쇼크'로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 지구 출신인 월인의 부모들은 오랜 시간 달의 환경에 노출되면 우주암에 걸리기 때문에 3년 이상 달에서 살 수 없는 법안까지 만들어진 상황. 월인 아이들은 부모를 잃거나, 혹은 지구로 향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적인 두 선택지 앞에 놓인다. 이러한 이유로 다이의 동생 라테라사를 마지막으로 달에서 임신과 출산을 금지하는 법안이 제정된다.
"...... 그러면 월인도 멸종위기종이겠네요."
멸종위기를 주제로 한 수업을 듣던 다이는 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한다. 비극적인 사고로 친구들을 잃고 달에서 3년을 지내다 떠나는 '임시 체류자'만을 맞이하고 떠나보내며 다이는 월인 신분에 무력감을 느낀다. 지구에선 방사성폐기물을 할아버지가 근무하는 달 기지에 매립하지만 여기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은 없으며, 인구가 많지 않은 월인에겐 대학 진학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이 부당한 대우들은 우리 사회에 유구하게 존재해 온 차별을 꼬집는다. 월인이 태어날 때부터 보유한 특정 조건(약한 신체) 때문에 기본권을 침해 받는 장면들은 독자가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현실과 다른 세계관을 통해 한 발 떨어져 봄으로써 독자는 더 객관적으로 불합리함을 알아차릴 수 있다. 실은 우리 주변에 언제나 '월인'이 무수했음에도 말이다. 출신 지역, 인종, 자라온 배경 등 선택할 수 없는 천부적 조건으로 인해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국내엔 특히 월인과 꼭 닮은 아이들이 있다. 어렸을 때 한국으로 이주했거나 심지어는 한국에서 태어났음에도 여러 이유로 법적 체류 자격을 갖지 못한 '미등록 이주아동'이다. 이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불법 체류자 신세가 된다. 바로 추방되는 것은 아니고, 한국이 비준한 '유엔아동권리협약'에 따라 한국에서 고등학교까진 다닐 수 있지만 법적 신분을 취득하지 못해 기본적인 보호를 받을 수 없다.
11월 8일, 전북 김제시의 한 특장차 제조업체에서 미등록 이주아동으로 살다가 올해 거주 비자를 받은 강태완 씨가 작업 중 숨졌다. 만일 그가 미등록 이주아동이 아니었더라면, 삶에서 더 많은 선택지를 가질 수 있었다면 어떤 어른으로 자랐을까. 자유롭게 꿈꿀 수 있을 환경에서 자라야 하는 아이들에게 여전히 사회는 비정하고 가혹하다. 소설은 이 씁쓸한 현실을 정확히 포착해 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게 되나요
소설은 환경오염에도 주목한다. 지구 사람들은 넘쳐나는 쓰레기를 소각하고 매립하다 못해 달에다 묻기 시작한다. 이 발칙한 상상에 웃음이 나오다가도 진짜 현실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오싹해졌다.
재밌는 설정은 지구 사람들이 혐오시설인 매립지나 개발 구역을 지구에서 보이지 않는 달의 뒷면에 둔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어지는 게 아닌데도, 불쾌함을 유발하는 대상은 최대한 멀리,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 두고자 하는 욕망에선 인간의 오만함이 느껴졌다. 지구를 넘어서 우주까지 인간을 가운데에 두고 생각하는 이기주의. 만족을 모른 채 끊임없이 기술을 발전시키고, 언제나 더 넓은 영토를, 미지의 공간을 정복하고자 하는 제국주의적 사고와도 맞닿은 대목이다.
쓰레기 문제 역시 이미 오랫동안 지적돼 왔지만 개선되지는 않는 문제다. 우주를 떠다니는 쓰레기뿐 아니라, 당장 우리가 사는 지구의 해양에도 부유성 쓰레기가 모여 '쓰레기 섬'으로 불리는 거대 쓰레기 지대들이 형성되고 있다. 영화 '고래와 나'에선 국내 원양어선의 불법 쓰레기 투기 장면이 등장한다. 밧줄, 어망 등 어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쓰레기는 물론이고, 세탁기, 냉장고 등 처리가 어려운 대형 쓰레기를 고민의 기색 없이 바다로 던지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달이 너희들 쓰레기통이야? 달이 지구인들 거냐고!"
다이의 이 외로운 외침은 지구에서 인간과 공생하는 각종 생물이 하고 싶을 말을 대변하는 것만 같다.
상상력의 힘
SF소설이라는 점에 주목해 책을 소개했지만, '달의 뒷면을 걷다'는 1980년대의 대표 순정만화가인 권교정의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를 재해석한 작품이기도 하다. 1999년에 첫 연재를 시작해 아직 완결되지 않은 작품에 상상력을 더해간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 책이 가지는 의미는 더욱 클 것이다.
우리가 아직 발 디디지 못한 세계라 여겼던 달의 뒷면은, 실은 우리가 늘 발붙이고 살아가는 현실세계의 뒷면이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이야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을 가진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라도, 좋은 SF 작품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