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진실을 선택해야 한다면 - 추락의 해부 [영화]

글 입력 2024.11.2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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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의 해부>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테드 창의 소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에는 ‘리멤(REMEM)’이라는 기술이 등장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기억에 대한 발명품인 이 기술은 차량의 블랙박스처럼 일인칭 시점으로 사용자의 모든 순간을 녹화한다.

 

리멤을 착용한 당신은 이제 과거의 어떤 순간으로든 돌아갈 수 있다. 당신이 한 말, 타인이 당신에게 한 말, 당신이 들은 말은 모두 객관적으로 녹화된다. 언뜻 생각하면 이 기술이 당신의 삶을 크게 바꾸진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기억이라는 능력을 갖추고 있고, 우리의 기억이 틀렸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테드 창의 소설이 말하는 것은 모두가 각자의 진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기억과 사실적 진실은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 우리가 쓰는 진실은 우리의 기억이 쓰는 진실이며, 우리의 기억은 절대 객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리멤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런데도 거의 모든 것이 녹화되는 시대다. 일상에서 우리는 많은 CCTV와 사람들의 눈에 둘러싸여 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감시카메라처럼 우리의 행동을 기억한다. 그렇기에 현대 사회에서 완전 범죄라는 것이 시간이 흐를수록 어려운 것일 테다. 이제 우리는 무언가를 알고 싶으면 그날의 녹화본을, 사람들의 증언을 찾으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삶에는 공란이, 아무도 증언하지 못하고 진실이 부유하는 순간이 존재한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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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의 해부>는 한 사람의 추락을 해부함으로써 진실을 추구하는 영화다.산드라와 사뮈엘, 그들의 아들 다니엘, 그리고 허스키 한 마리로 이루어진 가족은 스위스의 외딴 산속에서 사는 중이다. 평화로워 보이는 이 가족에게 어느 날 비극이 도래한다. 남편 사뮈엘이 추락해 집 앞 눈 덮인 땅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된 것이다. 사뮈엘의 죽음은 사고사이거나, 자살이거나, 혹은 타살일 테다. 타살이라면 유일한 용의자는 부인 산드라일 것이다. 유일한 증인은 시각장애인인 다니엘이다. 살인사건에서 시작했던 영화는 산드라가 기소되는 순간에 법정 드라마로 변모하며 비로소 시작한다. 카메라는 집요하게 산드라가 남편을 죽였는지, 그녀가 유죄인지를 파고든다.

 

법정 싸움 내내 많은 전문가가 등장한다. 검사와 변호사 측이 전문가들은 각각의 논리로 왜 산드라가 유죄인지, 혹은 무죄인지를 설명한다. 그동안 이들의 결혼생활에 대한 많은 사실이 제시된다. 사뮈엘이 우울증으로 정신과 의사와 상담하고 있었다는 것, 사뮈엘이 죽기 전날 둘은 심한 부부싸움을 했다는 것, 아들이 갖게 된 시각장애의 원인은 어쩌면 남편에게 있다는 것, 유명 소설가인 부인이 사실 남편의 작품을 일부 차용했다는 것, 아내는 양성애자이며 결혼 생활 중에도 부정을 저지른 적이 있다는 것 등등. 많은 논리가 오가지만 모든 명제가 반박 가능하다. 재판은 지지부진하고 별다른 증거가 발견되지 않으며 시간이 흐른다. 결국 이 재판의 열쇠를 쥔 사람은 다니엘이다. 다니엘의 증언이 모든 것을 바꿀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예상한다.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한 살인 혐의를 받는 이 재판에서 다니엘은 어떤 의견을 피력할 것인가.

 

다니엘은 마지막으로 증언하기 전에 자신을 돌봐준 법무부 직원에게 조언을 구하고, 직원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하나를 믿어야 하는데 선택지가 두 개라면 하나를 선택해야지. 판단을 해야 하는데 정보가 부족하면 결정하는 수밖에 없어.”

 

“믿음을 지어내라고요?”

 

 

대화가 끝난 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긴 다니엘은 오래전의 어떤 기억을 떠올린다. 어느 날 구토를 하는 스눕을 발견하고 아빠와 함께 동물병원에 갔던 기억을. 다니엘의 기억 속에서 사뮈엘은 헤어질 때가 언젠가 온다고 말한다. 그것이 자살을 암시한 말이라고 해석한 다니엘은 법정에서 사뮈엘이 자살했다고 주장하는 길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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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 영화는 진실을 불가피하게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결국 모든 진실은 이야기이고, 우리는 그 이야기의 파편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장면들만 가질 수 있다. 우리의 기억에서 발췌한, 왜곡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 장면들로 우리는 하나의 진실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고 일단 진실을 선택했다면, 만들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만 한다. 우리만의 확고한 진실을.

 

법정은 서사의 각축장이다. 많은 연극에서 법정이 나오는 장면을 삽입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사뮈엘은 자신을 “부당하게 대우받은 사람”으로 설정한다. 그가 자살했든 아니었든 간에 그는 법정에서 명백히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들을 남기고 죽었다. 산드라는 꾸준히 자신을 무고한 사람의 자리에 놓고자 분투한다. 남편의 분노에 희생당한 사람으로 말이다. 각자가 자신의 서사를 완고하게 만드는 것에 골몰하는 가운데 우리는 누구의 서사를 채택할지, 누구의 진실을 내 진실의 자리에 놓을지 고민해야 한다.

 

감독 쥐스틴 트리에는 산드라 역을 맡은 산드라 휠러를 “불투명한 캐릭터를 투명하게 연기하는 배우”라고 칭했다. 그 말처럼, 우리는 불투명한 서사들을 앞에 두고 무엇이 진실인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영원히 판단을 유보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일단 결정했다면, 그것을 진실로 믿어야 한다. 영화 마지막의 다니엘이 산드라에게 안기듯이.

 

영화를 끝까지 본 관객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영화 내에서 산드라는 무죄로 끝났지만, 당신의 마음속에서도 산드라가 무죄인가? 끝까지 카메라는 산드라를 의미 심상하게 담아내고, 영화관을 나오면서 관객도 자신만의 진실을 손에 쥐게 된다. 그렇게 영화는 우리에게도 진실을 선택할 자유를 선사하는 것이다.

 

 

[강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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