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만나고 싶지 않다면, 대체 왜 가는거냐 - 검은 사슴 [도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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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여성과 남겨진 자들은 장르를 불문하고 이야기의 서문을 여는 좋은 소재이다. 나의 눈부신 친구(my briliant friend)의 리라와 레누,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처럼. 하물며 겨울왕국 1도 사라진 엘사를 찾아 떠나는 안나의 모험이 아닌가. 남겨진 자들은 부재에 괴로워하거나 과거를 추억하고 그녀를 되찾고자 헤메인다. 벌써 세번째 홀연히 사라진 여인, 의선. 책 '검은 사슴'은 인영과 명윤이 덜그럭거리는 기차를 타고 폐광이 된 도시 황곡으로 떠나며 시작한다.
사라질 때 흔적을 남기지 않는 자와 만나고 싶지 않은 자를 찾아나서는 자. 이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상실을 마주한다.
의선을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외투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그러자 실망 대신 일종의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렇다면 왜. 나는 눈살을 모았다.
그 애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면, 대체 왜 가는거냐
- 검은 사슴, 31p
검은 사슴은 햇빛을 갈망하지만
인영은 월산으로 가는 차 안에서 의선이 첫 번째로 사라지던 날을 회상한다. 옷을 하나씩 내던지며 초식동물처럼 겅중겅중 횡단보도 위를 내달리던 의선. 그녀는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직접적으로 햇빛을 온몸으로 맞이한다. 옷가지가 막는 구석 하나 없이 모든 모공, 모든 털, 모든 구멍에 따뜻한 빛이 비친다. 고기를 먹는 것에 거부감을 넘어 본능적인 혐오감을 보이는 의선은 '채식주의자'의 영혜와도 비슷하다. 의선은 그래, 육식동물이라기보다는 초식동물에 가깝다. 그녀의 흰 복사뼈도 어딘가로 달아나는 그 불안감도. 다른 고기를 먹지 못하는 성정도. 모든 것을, 심지어 자신이 입고 있는 옷조차도 선뜻 내어주려는 유약함도. 의선은 탄광 안의 검은 사슴을 닮았다.
그때부터 이 짐승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채 컴컴한 암반 사이를 느릿느릿 기어다니며 흐느껴 웁니다.
마지막으로 숨이 넘어갈 때쯤 되면 이 짐승의 살과 뼈는 검은 피와 눈물로 다 빠져나가, 들쥐 새끼만하게 쭈그러들어 있다지요.
- 검은 사슴, 192p
검은 사슴은 햇빛을 보고 싶어 제 뿔을 내어주고 결국에는 제 이빨까지 잃어버려 검은 피와 눈물을 흘리다 죽어버리는 탄광의 그림자 속에서만 사는 짐승이다. 기어코 밖을 나와도 햇빛 아래 붉은 덩어리로 녹아버리는 가여운 짐승. 강렬한 햇빛에 그녀의 쇠약한 나신이 살색의 액체로 뻘뻘 흘러 녹아내리지는 않았지만 검은 사슴만큼이나 의선도 햇빛을 갈망한다. 갈망은 결핍에서 나온다. 의선의 삶에는 햇빛이 없다. 그녀의 사무실은 빛이 새어들지 않아 종일 형광등을 켜놓고 지내야 하고 자취방에는 희부스름한 햇빛만이 작은 공간을 비추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자취방 안 의선의 토우들은 옥상에서 햇빛을 바라보는 그 주인과 같이 햇빛 쪽으로 몸을 향해 일렬로 앉아 있다.
햇빛은 검은 사슴과 의선에게 외로움으로부터의 구원이다. 탄광 속의 검은 사슴은 제 동족이 있는 줄도 모르고 죽는다. 반면 밝은 빛이 비칠 때 인간은 서로를 인지하고 안심한다. 우리는 그래서 살을 맞대고 싶다. 자며 뒤척이는 머리를 쓰다듬고 기대어있고 싶다. 잠은 눈을 감아 스스로가 불러오는 어둠이다.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으니, 빛이 없을 때 온기를 느끼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의 살을 만지는 것이다.
나는 말을 하고 싶어요. 살을 만지고 싶어요.
누구라도 좋아요. 사람의 살을 만지고 싶어요.
- 검은 사슴, 390p
의선이 자꾸만 인영의 머리를 매만지던 것은 악몽을 꾸며 몸부림을 치던 인영에게 자신의 존재를 전하고 싶어서였으리라. 탄광 안에 갇힌 두 광부가 체온을 보존하기 위해 등을 꼭 맞대고 있는 것 같이, 식물이 햇빛을 향하여 자라는 것과 같이 사람은 다른 사람을 향해 손을 쭈욱 구부러트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손을 휘저어도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아도 손에, 눈에 닿는 것이 없을 때 사람은 계속해서 몸부림을 치게 된다.
적요함과 어둠
'검은 사슴' 속 인물들은 상실을 경험한다. 이후에 따라오는 몸부림은 정상적 애도 반응을 넘어 그들의 삶 자체를 변화시킨다. 장의 아내는 정신병증에 걸려 도피하기를 택했고 장은 아이들을 남겨둔 채, 원망하는 눈빛의 아이들을 차갑게 바라본 채 아내를 찾아 몇 년을 떠돈다. 그의 눈빛은 이미 죽은 사람의 그것이다.
인영의 어머니는 또 어떤가. 책임감이 강하던, 남을 위해 기꺼이 제 튜브를 던져주는 인영의 언니를 찾다 찾다 결국 정신을 놓아버리지 않았나. 놓지 못하기는 인영도 마찬가지이다. 인영은 빛을 가두려 꼭꼭 커튼을 친다. 다른 말로 하면, 곁을 주지 않으려 애쓴다. 빛이 닿으면 검은 사슴은 녹아버리고 말 테니까. 하지만 빛에 녹아버린 의선을 거두는 것도, 추위에 얼어버린 명윤을 붙잡아 나오는 것도 인영이다. 언니를 잃고 어머니를 잃고 관계를 책임이라 생각하며 도망가지만, 그녀는 결국 어쩔 수 없이 이상한 곳에서 다정한 사람이다. 그녀가 처음 꾼 꿈. 바다에서 격렬한 눈물이 뿜어져 나오며 몸이 귤껍질처럼 오그라들어 녹아내리는 이 꿈은 끝내 빛을 보지 못하고 눈물로 녹아내린 검은 사슴의 꿈이다. 그러니 결국 인영도 의선과 마찬가지로 검은 사슴이다.
어둠의 덩어리가 스스로를 감싸고 있다고 인영은 표현한다. 그녀의 영혼은 외로움으로 완성된 것이어서, 혹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기로 한다. 그 어둠은 적요한 방과 같이 인영을 지켜준다. 하지만 그 깊은 어둠, 깊은 바다를 의선이 깨버린다. 사람들이 가지는 어둠에 대한 친밀감이 열 달간 지냈던 태중의 어둠 때문이라면 출생 때 빛을 향해 나아가던 기억은 빛에 대한 본능적인 열망을 각인시키는 게 아닐까. 그렇기에 의선의 등장은 반가운 것이지만 동시에 불청객다운 면이 있다. 의선을 찾지 못하게 될수록 인영이 마음의 평온함을 찾아가는 것은 의선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인영 자신을 똑바로 마주보기 어려워서일 것이다.
그녀는 이 여행에서 적요 속에 묻어 둔 자신의 상실을 들여다본다. 적요하다는 말은 이 소설에서 참 많이 쓰이는 표현이다. 그것은 눈 덮인 연골을 서술할 때도 쓰이며, 새벽의 적막을 표현할 때도, 의선의 목소리, 지하방의 어둠, 깊은 물 속을 말할 때도 쓰인다. 적요를 유지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말하지 않는 것이다. 인영이 좋아하던 옛날의 의선은 그 고요함을 뚫고 수줍게 한 두어 마디를 조심스럽게 꺼내던 이였고 명윤이 좋아하는 현재의 의선은 침묵의 종말을, 다그쳐 묻는 것을 힘들어하는 인물이다. 적요함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그 자신처럼. 그가 되는대로 떠오르는 말을 내뱉는 것은 적요함 속에서 말을 고르는 시간이 고통스러워서다. 명윤은 지나치게 적요한 세상을 인식한 어느 날 밤, 자신이 존재하지 않고 있음을, 그리고 이 상태가 지속될 것임을 예감한다. 그는 적요함 속에서 스스로를 잃어버린다.
"넌 어둡고 습기찬 걸 싫어하니까."
"그게 무슨 뜻이죠?"
글쎄, 하고 인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재차 묻는 그의 얼굴을 낯선 사람처럼 바라보며 인영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땀과 피를 싫어한다는 뜻이야."
느닷없는 비난 때문에 그는 할 말을 잃었다.
- 검은 사슴, 120p
명윤은 어둡고 습기 찬 장소를, 땀과 피를 싫어하는 사람이기에 글을 붙잡으며 빠져나온 구덩이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말을 아끼는 사람들 곁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 침묵이 인영의 침묵처럼 진심을 숨기고 있는 침묵이더라도. 어떠한 위로도, 비난도 하지 않는 타인이 만들어낸 적요함에서 그는 역설적으로 위로를 느낀다. 명윤은 인영의 어두운 바다 사진을 장의 강한 광산 사진보다 좋아한다. 장이 찍은 그 사진들은 플래시를 통해 광산 안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다. 어두움을 드러내는 고발이며 빠져나온 구덩이를 비추는 격이다. 여행이 시작되기 전의 명윤은 아직 그 어둠을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명윤은 열에 들떠 인영을 선배가 아닌 누나라고 부르고 싶었다고, 이 여행이 끝날 때쯤에는 의선을 찾지는 못해도 그 애의 행동들의 이유는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고 중얼거린다. 명윤이 그토록 강박적으로 의선을 찾으려 했던 것은 그의 누이 명아를 찾는 것을 그만둔 죄책감과 무력감 때문이다. 그 사실을 떠올리게 하는 침묵을 견디기 어려워하면서도 제 발로 적요한 눈밭으로 걸어 들어간다.
검은 사슴은 마침내 햇빛을 보았을까
갈망하던 햇빛 아래 녹아내리며 울부짖는 검은 사슴은 의선 같지만, 사실 여기 나오는 등장인물 모두이다. 이들은 커다란 상실을 경험하고 다시 햇빛의 온기에 닿아있기를 원한다. 인영처럼 그것이 거꾸로 발현되어 완전한 적요 속에 살아가기도 명윤처럼 타인과의 쉴 새 없는 대화를 통해 자신이 빛에 나와 있음을 확인하려 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의 상실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것도 구원이 되지 못한다. 의선이 햇빛을 받고 또 받아도 결국 눈 덮인 연골로 도망쳤던 것은 내면의 상처가 극복되지 않은 그녀에게 따가운 빛이 도리어 상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섣부른 관계에 상처받은 그녀는 다시 어둠 속으로 숨어버린다.
결국 구원은 셀프이다. 그와 동시에 상호작용이다. 의선이 본인의 머릿속에 담을 일기를 한 줄 한 줄 정제해 나가던 것이 떠오른다. 그렇게 한 줄, 한 줄을 줄이고 어렵사리 만들어 낸 한 단어를 전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을까. 그 지난한 과정을 지나 전해진 마음은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만큼이나 따스하다. 단순히 타인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를 충분히 되돌아본 뒤에야 진실한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기에 마지막에 돌아온 타다 남은 사진 한 장은 진정한 구원의 가능성이며 진실한 관계의 희망이다.
[윤희수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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