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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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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아도르노는 칸트가 설명한 두 가지의 숭고(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의 메커니즘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논리구조에 따라 변형시킨다.

 

그렇다면 아도르노는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칸트의 숭고를 받아들이고 있는가? 아도르노는 칸트의 두 가지 숭고 중, 역학적 숭고의 메커니즘에 주목하여 그것을 중점적으로 비판한다. 왜냐하면 수학적 숭고와 달리 역학적 숭고에서 인간은 자연의 위력으로부터 고유의 '두려움'과 '전율'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칸트의 숭고가 위력을 가진 대상 앞에서 맞설 수 있는 저항의 능력을 강조했다는 점에서는 칸트의 숭고 메커니즘을 일부 받아들인다. 하지만 아도르노에 따르면, 칸트의 숭고 모델은 주체가 자연의 위력에 자신을 빗대어 스스로를 숭고한 자연으로 잘못 인식하도록 귀결시켰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고 비판하고 있다.

 

즉, 칸트의 숭고 모델에서 주체(인간)는 자연에 지배받지 않기 위해 자연으로 향하는 지배의 방향을 바꾸기만 한 것일 뿐, 지배는 계속되면서 주체는 결국 자신이 가한 지배 관계에 자신까지도 얽혀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도르노는 칸트의 숭고 모델에서 표면적으로는 대립 관계로 보이는 '자연성 그대로(야만성)의 상태'와 '인간이 자연에 절대 주권으로 자리한 상태'는 역설적으로 유사하다고 추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위력을 드러내는 자연의 야생성과 타자를 지배하기 위해 결국 자기 자신까지 지배해버림으로써 끝내 지배권을 얻었다고 여기는 '절대 주권'의 상태는 결코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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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아도르노는 칸트의 숭고 모델이 지닌 문제점을 어떻게 극복하고자 하는 것일까? '외압에 굴복하지 않는 정신의 저항성'이라는 기본 틀은 유지하면서, 칸트의 숭고 모델이 필연적으로 귀결하게 되는 지배 관계의 전면화 난제를 어떻게 그는 해결하고자 하는 것인가? 필자가 주장하는 아도르노의 수용 전략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칸트적 숭고의 기본 틀은 유지하되, 숭고의 '내포'를 변경하여 그것을 이중적 차원에서 전개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도르노에게 진정한 숭고의 경험이란 주관의 차원과 객관의 차원, 즉 이중의 차원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때 이중의 차원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고 상호 구성되는 관계인데, 각각의 차원은 서로를 계기로 가지면서도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이 필자의 분석이다.

 

한편으로, 주체는 숭고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객관적인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인식 메커니즘이 그러한 대상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주체 자신이 깨닫게 되면서, 주체 내부에서는 동요가 일어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숭고에 대한 칸트의 규정은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예술의 영역으로 이식(Transplantation)하게 되었고, 그 과정을 통해서 자기도취적이었던 숭고의 개념이 비로소 자기 자신의 바깥을 넘어서 초월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 필자의 아도르노의 숭고 전략에 대한 분석이다.

 

따라서 숭고함은 예술 작품 자체의 '객관적인' 속성이기도 한 것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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