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선한 탐구심을 향하여 - 캐드펠 수사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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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거리가 차고 넘치는 현대 시대에 취미로 하는 독서는 사람을 다분히 이지적인 이미지로 만들어준다. 이는 텍스트 자체에 재미를 붙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인식 때문인 듯하다. 감히 말하건대, '재미없는' 책도 존재할 뿐, 책이라는 매체 자체가 반드시 재미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우리는 넓은 콘텐츠의 세계를 유영하고 있고 그 사이에서 책은 한낱 레거시 미디어에 불과할 수도 있다. 책의 세계는 그 자체로 넓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자체로 깊은 감정의 세계이기도 하다.
줄글로 된 책의 묘미는 천천히 소설 속으로 빠져들어 느리고 깊게 몰입하는 경험에서 탄생한다. 특히 작가의 서술에 의존해야 하는데, 이것이 오히려 고행길을 걸어 나가듯 책을 펼치기 전의 풍경은 잊고 길 위의 자신에 집중하게 되는 듯한 특별한 몰입의 경험을 제공한다.
책에 집중하다 보면 어떤 구간에서는 세심한 세계의 묘사에 잠시 발을 멈추며 그 풍경을 감상하기도, 인물의 내면으로 깊이 빨려 들어가며 어떠한 감정을 깊이 머금기도, 빠른 속도로 내리막길을 내달리는 것처럼 심장이 빨리 뛰는 설렘을 느끼기도 한다. 독자에게 이러한 다채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장르를 찾아 헤매는 사람이 있다면 추리물, 그중에서도 ⟪캐드펠 수사 시리즈⟫를 읽고 텍스트의 매력을 유감없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 는 전형적인 추리 소설과는 다른 독특한 매력을 지닌 작품이자 '소설' 자체의 재미와 인문학적인 가치를 모두 잡은 작품이기도 하다.
새롭게 정의하는 추리 소설의 온도
추리 소설이라 하면 고전 명작인 셜록 홈스 시리즈가 떠오른다. 흐릿하고 음울한 안개가 짙게 깔린 영국의 풍경, 냉철하고 유능한 탐정과 푸르게 빛나는 그의 천재성, 신경질적이며 수상한 용의자들. 이 때문에 추리 소설은 차가운 서스펜스를 선사하는 장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캐드펠 수사 시리즈⟫가 역사추리소설이라는 데서 다소 건조한 문체를 쓸 것이라고 상상하며 독서를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이 예상과는 다른 온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책의 전반에서 놀랄 만큼 우아한 문체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작가는 인물과 풍경을 그려내는 데 있어 감성과 이성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추리 소설에서 표현 자체에 감동하게 한다는 어려운 일을 해냈다.
메리엣은 평소처럼 굳은 표정으로 일을 시작했으나, 전에 수도원의 과수원에서 그랬듯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제 어두운 그늘에서 밝은 햇살 속으로 조금씩 나오는 듯했다. 그는 숲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가벼운 걸음으로 잔디밭을 밟았다. 대지에서 자양분을 섭취하기라도 한 양, 그의 얼굴은 비 온 뒤의 꽃봉오리처럼 점점 환하게 피어났다. (...) 누렇게 바랜 무성한 풀밭에 누운 그는 마치 그 땅에서 자라난 식물, 곧 다가올 겨울을 기다리며 반쯤 잠든 한편 새로운 한 해를 예감하며 반쯤 깨어 있는 식물처럼 더없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 8: 귀신 들린 아이 中 p.174
추리 소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책을 읽을 때 자신도 모르게 긴장해 있던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독자 스스로 탐정이 되어 소설 전반에 깔린 복선을 놓치지 않고 추리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능한 모두를 용의선상에 올리고 수상한 정황을 포착하려는 노력은 사실 추리 소설을 읽을 때 자연스러운 자세이면서도 때로는 독자를 지치게 하기도 한다. 짧은 호흡이 아니라 긴 호흡으로 전개되는 소설일수록 더욱 그렇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의 매력은 환경과 배경, 인물의 묘사에 충실하면서도 섬세한 표현으로 이렇게 경직된 독자의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풀어준다는 데 있다. 소설의 끝까지 이어지는 서스펜스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타이밍에 노련한 솜씨로 독자의 감정을 주무르는 작가의 역량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런 면에서 이 시리즈는 그 자체로 추리 소설의 또 다른 장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고 느꼈다.
초월적 존재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탐정
⟪캐드펠 수사 시리즈⟫의 주인공은 그러한 감성적인 문체와 조화를 이루는 성격을 지닌 인물로 등장한다. 추리 소설에서는 주인공인 탐정이 원탑이 되는 만큼 주인공을 어떻게 일관적이면서도 매력적으로 묘사할지가 무척 중요하다. 천재적인 두뇌와 집요한 관찰력,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까지 갖춘 탐정을 현실에 가져다 두면 무척이나 튀겠지만, 추리물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러한 탐정 주인공은 이미 다양한 매체에서 수차례나 본 만큼 탐정 캐릭터의 원형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천재 탐정 타이틀을 단 인물이라면 천재성을 전달할 방법에 대한 고민에 시달리겠지만, ⟪캐드펠 수사 시리즈⟫에서는 주인공의 다른 면을 부각하는 데 집중한다. 주인공 캐드펠 수사는 천재성보다도 감성과 차분함이 두드러지는 인물이다. 산재해 있는 단서를 귀신같이 포착해 퍼즐처럼 한 피스 한 피스를 모아 사건의 전체 그림을 완성하려는 집요함은 탐정에게 요구되는 끈기이고 캐드펠 수사에게서도 그러한 탐정의 면모를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인상적인 점은 탐정으로서의 그보다도 인간으로서, 수사로서 그의 인간성이 곳곳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예요? 뭐가 잘못되었나요?"
"네가 두려워할 일은 아니다." 꼭 알아야 할 때가 오기 전까지는. 그는 가슴이 에이는 듯한 슬픔을 느끼며 마음속으로 덧붙였다. 적어도 소년이 음식을 먹고 몸을 덥힐 때까지는, 자신의 생명이 틀림없이 안전하다는 확신을 얻기까지는 이런 일에 대해 알 필요가 없었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 6: 얼음 속의 여인 中 p.77
많은 추리 소설에서 탐정을 천재로 설정하면서 다소 냉철하고 오만한 면을 지닌 탐정이 탄생하기도 한다. 그도 그 나름의 인간성과 연민을 지닌 인물이지만, 캐드펠 수사는 그 어느 탐정보다도 사람과 감정적으로 교류하고 소통하는 정 많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무척이나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는 사건의 단서를 얻고 사건 해결에 참고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사람을 취조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마음을 열면서 그와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그가 중요한 단서를 포착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천재 주인공의 두뇌 앞에서는 꼼짝 못 하는 독자에 불과했던 과거를 생각했을 때, 이러한 점 덕에 비교적 흥미롭고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설득이 아닌 이해, 그 이해로부터의 연민
이러한 주인공의 설정은 단순히 인물에게 매력을 더하는 것 이상의 기능을 수행한다. 작가는 캐드펠 수사의 시선과 동화되도록 유도하면서 결국 이야기의 끝에서 독자에게 인간에 대한 이해를 가능케 한다는 목적을 달성한다.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추리 소설에서 추리의 목적은 언제나 정의의 실현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책 속의 인물뿐만 아니라 독자 또한 추리 과정 중 어떤 인물의 도덕성이나 가치관, 과거 행실을 이유로 수도 없이 사람을 판단하지만, 그 사람의 한 가지 면을 안다는 것이 그 사람을 이해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의 수많은 구절에서는 끊임없이 사람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인물의 행동 원리를 해명하기 어려운 본성이나 시시각각 바뀌는 가치관 따위로 해석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인물이 어떤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억지로 이해시키려 들지도 않는다. 그 인물이 되어 시간의 흐름과 쌓여왔던 감정들을 바탕으로 이해를 자아내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라는 감정에 도달하게 된다.
이 여인의 찬란한 희망에 의혹을 던지려 해봐야 소용없는 짓이리라. 이제 와 새삼 겁을 먹기에는 이미 너무도 오랫동안 그늘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해결되지 못한 살인 사건 같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죄악이든 결백이든 그녀에겐 아무 차이도 없을 것이다. 오직 한 가지 목표만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으니, 무엇도 그녀를 거기서 물러나게 하지 못할 터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소꿉친구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중 한 남자는 자신의 젖형제이자 영혼의 친구와 장래를 약속한 여자를 사랑하며 마음을 좀먹는 고뇌를 품어왔다. 아니, 그가 남자로서 아픔을 느낄 만큼 장성할 때까지는 젖형제에 대한 사랑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한층 성숙하고 예리한 감정을 느끼는 여자아이들에 비해 또래의 남자들은 늘 뒤늦게야 무르익는 법이니까.
캐드펠 수사 시리즈 9: 죽은 자의 몸값 中 p.269
캐드펠 수사의 시선은 사람을 용의선상에서 포함하거나 배제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되지 않고 사람을 응시하며 그 사람을 조금씩 알아가는 데 사용된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성급히 의심하지 않게 되고 인내심을 가진 채 사람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그의 시선에서 우리는 삶의 태도를 배울 수 있다.
리뷰를 마무리하기 전에, 이처럼 소설의 의미와 콘텐츠의 오락성을 전부 기대치 이상으로 담고 있는 작품은 드물다는 점을 꼭 다시 짚어주고 싶다. 게임처럼 엔딩을 향해 경주하는 재미 이상의 인문학적 의미가 추리 소설에 있다면 캐드펠 수사의 선한 탐구심을 들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서예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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