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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영화 '와일드로봇'의
스포일러를 다량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장르 중 애니메이션을 특히 좋아한다. 실제 사람이 나오는 영화는 사건들이 어디선가 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과몰입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커다란 감정의 소모가 장점일 경우도 있지만. 그에 반해 애니메이션은 완전한 창작의 영역인지라 지금 펼쳐지는 극에만 집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 '와일드로봇'은 현실에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너무나 애니메이션다운 내용이기에 오히려 슬프다. 누군가가 붓질로 만들어 낸 수채화가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한 동화적인 애니메이팅이 그 감정에 큰 몫을 한다.
아기 기러기의 비행연습 때에도, 로봇과 여우가 서로의 몸에 기대어 겨울을 날 때에도 눈물이 글썽 맺혔지만 크레딧이 올라가며 눈물샘을 자극했던 것은 특정 장면이 아니었다. 영화가 너무 아름다워서. 단지 그 뿐이다.
날개를 펼치는 나비, 새, 로봇
'와일드로봇'은 인공지능 로봇이 야생에 불시착한다면? 이라는 상상에서 출발한다. 숲 한 가운데 떨어져 주인을 찾지 못한 로줌 유닛 7134, 로즈는 아직 부화하지 못한 기러기의 알을 발견한다. 부화한 아기 기러기를 무사히 무리에 합류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받아들이며 로즈는 핑크(여우)와 함께 브라이트빌(기러기)를 돌본다.
로즈가 자신의 임무를 찾으려 숲을 돌아다니다 나비 떼를 마주하는 장면은 영화의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이다. 환 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조금의 소름이 유발될 수 있는 장면이지만, 나무에 붙어있던 나비들이 일시에 날개를 펼치며 하늘로 날아가는 장면은 장관이다. 노을 지는 숲속으로 로즈와 브라이트빌이 함께 비행 연습을 하는 장면도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답다. 혹시 두 장면의 공통점을 눈치채셨는지. 여린 날개를 포르르 떠는 나비들도, 두 팔을 쭉 뻗어 달리는 로즈도, 작은 날개를 퍼덕이는 브라이트빌도 모두 날아가기 위해 움직인다. 그 장면들이 아름다운 것은 섬세한 애니메이팅의 덕도 있지만 날아간다는 그 동력 때문이기도 하다.
난다는 건 기본적으로 저항을 내포하는 행위이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본디 그렇게 정해진 물리법칙이다. (출근길로 향하는 발이 참 무거운 것도 이 중력 때문임이 분명하다.) 날개가 달린 존재들은 그렇기에 처음부터 정해진 길의 반대를 꿈꾼다.
["조심스레 한 발씩 걸으면 삶은 널 스쳐 갈 뿐. 하지만 넌 날개가 있어. 한번 힘껏 날아봐. 여기 머물면 안전하겠지. 그럼 모든 건 늘 제자리. 피하지 말고 용기 있게 싸워 이겨내. 그럼 네 진짜 모습을 보게 될 거야."] - Kiss the Sky 가사 중
브라이트빌과 로즈가 비행연습을 할 나오는 삽입곡, 매런 모리스의 kiss the sky가 흘러나오며 감동은 정점을 찍는다. 태어날 때부터 날개가 제 동족에 비해 몹시 작았던 브라이트빌에게 비행은 특히나 더 불가능한 길 같아 보인다. 하지만 작은 날개여도 힘껏 날기 위해 퍼덕일 때, 그리고 그것을 마침내 해낼 때 느끼는 쾌감은 짜릿하다. 이는 우리 모두가 불가능한 것에 대한 저항의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야생의 본능과 로봇의 프로그래밍
'와일드 로봇'은 조금은 급작스럽게 주제의식을 확대해나간다. 동화적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수도 있겠다. 두 생물, 아니 생물과 무생물의 교감에서 모든 동물의 공생으로. 무생물인 로봇과 그 로봇을 어미로 각인한 어린 기러기의 만남에서 혹시 모성애가 로봇의 숨겨진 인간성을 깨우는 그 로트인가 싶어 약간 삐딱한 자세로 초반부를 지켜보았다. 삐딱한 시선이어서 그렇지 감동적인 지점이기는 하다. 당장 누군가를 책임져야 할 때 존재는 성장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영화는 둘 간의 좁은 관계에서 끝나지 않는다. 교활한 여우, 핑크가 나왔을 때부터 예견된 그림이었나보다. 핑크는 다소 도구적으로 쓰이지만 그래도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매력적인 캐릭터다. 그는 처음 나올 때부터 자연의 비정함을, '본래' 그렇게 되어있는 약육강식 세계의 논리를 설파한다. 자연이란 원래 그런 곳이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먹이를 구해야 한다. 빨리 달리는 사슴이 되거나 남보다 사슴을 빨리 잡는 포식자가 되거나. 사실이 그렇다. 사슴을 빨리 잡지 못하는 사자는 굶어 죽고 말 것이다.
그래서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잡으러 다니는 것은 본능이다. 이 DNA에 새겨진 본능과 가까운 것은 로즈에게도 있다. 바로 회로에 새겨진 프로그래밍이다. 임무를 완수하면 복귀 프로토콜을 실행"해야 하고" 이름은 숫자의 나열로 붙여 "져야 한다." 임무 수행은 로줌 유닛이 만들어진 목적이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로즈는 로봇치고는 꽤 자주, 쉽게, 프로그램을 셧다운시킨다.
로봇이 임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곰이 여우를 잡아먹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이미 자연의 논리에 찌들어버린 필자는 모든 동물들이 친해진 장면을 보고 그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가 화목하면, 육식동물들은 어떻게 되는 건데? 비슷한 영화 주토피아에서는 벌레 버거나 물고기 너겟을 활용했었다. (물고기 록마우스를 깨워서 보냈던 것은 로지의 큰 그림이었던 셈이다.) 임무를 수행하지 않아 폐기될 위험에 처한 로봇은 동물들과 싸워 전투로봇을 돌려보낸다. 불곰 토른과 여우 핑크도 나름대로 공존할 방법을 찾겠지.
그러니까 결국 중요한 것은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성이다. 본능을 제어할 생각이 없으면 사회는 누가 더 빨리 사슴을 잡느냐, 혹은 누가 더 빨리 도망가느냐의 싸움이 된다. 그래야 굶지 않으니까. 하지만 사슴을 잡아야 하는가. 그것이 단지 본능이기 때문에? 사슴과 함께 사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사회의 방향성은 달라진다. 대체육을 개발하든, 단백질을 합성하든, 방법을 고안해 내는 것은 그다음의 일이다.
동화에서 잠시 벗어나 보자. 이러한 본능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 현실 세계의 사람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가 아닐까. "나에게 필요한 건 여기에 다 있어"라는 로즈의 말처럼 필요한 것은 프로그래밍이 된 회로가 아닌 심장이다. 본능을 거스르려는 동물들과 프로그래밍을 벗어나려는 로봇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상생과 반대되는 쉬운 길을 가는 사람들은 어쩌면 퇴화 중인 것은 아닐까.
그러니 우리는 서로의 날개가 되어주자
마땅히 진행되어야 하는 편한 길은 본능에 각인되어 있다. 이를 이겨내게 하는 것은 계속되는 도전과 그에 선행되는 믿음이다. 날아오르는 브라이트빌의 작은 날개에서 로즈의 활짝 핀 팔이 겹쳐 보이는 것은 로즈의 믿음이 브라이트빌을 하늘로 올려주는 발판이었기 때문이리라.
["Sometimes to survive, we must become more than we were programmed to be. 때로는 살아남으려면, 프로그래밍된 자신을 뛰어넘어야 해."] - Wild Robot 대사 중
본능은 생존을 위해 개발되지만 가끔은 프로그래밍된 자신을 뛰어넘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 중력을 거스르려면 날갯짓이 필요하다. 이 날갯짓이란 본능이 아닌 본질이다. 로즈는 사회에서 끊임없이 배척당한다. 다른 생김새, 다른 말투. 로봇 사회에서도 이방인이며 자연계에서는 더더욱 이방인이다. 이쪽의 프로그래밍에도, 저쪽의 본능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즈의 본질은 그런 것이 아니다. 상냥함이다. 그 본질을 알아봐 주는 동물이 있을 때 상냥함은 빛을 발한다. 괴물 로봇에게서 길러졌고 남들보다 작은 몸집과 날개를 가진 브라이트빌이 기러기 무리를 탈출시켰듯이. 와일드 로봇은 결국 로줌 유닛 7134가 로즈가 되는 과정이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알아봐 주자. 서로의 날개가 되어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