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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창 시절, 웹툰은 그리 유명한 콘텐츠가 아니었다. 당시에는 만화책이 훨씬 더 접근성이 좋고 인기 있었다. DVD 대여점에서 만화책을 빌려 보고, 서점에 가서 만화책을 사서 보던 시대. 약간 묵은 냄새가 나는 갱지로 만들어진 만화책을 뒤적이며 여가 시간을 보내곤 했더랬다.

 

하지만 시간은 빠르게 흘러, 만화 카페라는 특정 공간을 굳이 찾아가지 않는다면 만화책을 접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플랫폼의 변화는 만화책을 향한 향수를 느끼지도 못하게 만들었고, 그렇게 내 기억 속에서도 만화책은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던 차였다.

 

그럼에도 장기 기억은 그리 빠르게 사라지지 않는다. 나에게는 아직, 그때의 기억들이 남아있다. 굉장한 신드롬을 일으키며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던 <궁>을 비롯하여 가슴 떨리며 읽었던 그때의 로맨스가 문득문득 떠오르곤 한다.

 

 

[표1] 달의 뒷면을 걷다.jpg

 
 

책 <달의 뒷면을 걷다>는 1980년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대한민국의 '순정만화 붐'을 이끈 순정만화계의 거목 3인과 2024년을 살아가는 현대의 SF 장르 소설가들의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탄생하였다.

 

소설이 근간으로 두고 있는 순정만화는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로, 1999년에 첫 연재를 시작하였지만 출판의 좌충우돌과 더불어 작가의 투병으로 인해 완결을 맺지 못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여타의 순정만화들과 달리,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SF적 요소가 가미되어 당시 큰 호응을 얻은 작품이었다.

 

이 같은 신선한 시도와 그에 따른 인기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당시 순정만화는 고정관념이 강한 장르였다.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아이들의 판타지 정도로 치부되곤 했다. 책 <달의 뒷면을 걷다>의 저자이자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의 오랜 팬이었던 전혜진 작가 역시 순정만화가 처한 현실을 통감하였다.

 

 

이것이 차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순정만화가 억압받던 여성 문학의 계보 어딘가에 놓여야 하는 물건으로 여겨졌다.

 

- "순정만화 한계 넘었다? 재수 없는 말!"…전혜진 작가가 순정만화·SF 컬래버한 이유, 한국일보, 2024

 

 

작품성에 비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순정만화의 위상을 알리고자, 직접 순정만화를 매개로 한 소설을 기획하고 집필하게 되었다는 저자. 소설을 읽기 전, 소설의 배경지식을 얻고자 찾아본 저자의 인터뷰를 읽으며 독자로서의 마음을 다잡았다.

 

책 <달의 뒷면을 걷다>의 출간 배경이 이리도 숭고할 줄이야. 어쩌면 나도 비슷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순정만화는 뻔한 장르라는 편견을. 반성의 시간을 건너 진지한 마음으로 책장을 펼친다. 작가의 진심을 어서 빨리, 온전히 느끼고 싶다.

 

소설의 시작 전, 원작의 소개가 간략하게 등장한다. 아무래도 현대의 독자들은 원작을 잘 모르고 있을 수도 있기에 작품을 더 잘 즐길 수 있도록 한 배려인 듯하다. 개인적으로도 원작을 접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원작 소개를 읽으며 기본적인 소설의 뼈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원작이 원래부터 다소 복잡한 작품인 것 같다. 이야기가 무척 철학적이고 등장인물의 작명도 생소한 편이다.

 

이 부분에서 벌써, 기회가 된다면 원작도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전혜진 작가의 소설은 원작의 주인공과 동일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디오티마'가 주인공이다. 달에서 태어나 달을 벗어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월인으로 태어난 디오티마라는 열여덟 소녀가 월인이라는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그 운명을 딛고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앞선 인터뷰에서 작가는 순정만화를 '놀라울 정도로 혁명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라고 소개한다.

 

 

순정만화는 여성 작가가 여성 독자를 향해 어떤 급진적인 말이든 할 수 있던 장르

 

- 위와 동일

 

 

직접 겪은 진한 경험이 저자 자신의 작품에도 스며들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쉽게 읽히는 가벼운 두께의 소설이지만, 이야기의 깊이는 결코 가볍지 않은 결과물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책 <달의 뒷면을 걷다>는 순정만화의 스웩을 고스란히 계승한 소설이었다.

 

더불어 소설을 다 읽은 후 원작이 더욱 궁금해졌다.

 

때로는 분노가 걸작을 만든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인 소설. 저자에게는 미안한 마음이지만, 그의 진심 어린 분노 덕분에 멋진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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