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퇴사하니까 나밖에 없어서 평온한데… 너무 심심해!”

 

퇴사하니 어떠냐는 질문이 오면 돌려주는 답변이다. 퇴사한 지 어영부영 두 달이 지나니 슬슬 좀이 쑤신다. 막 어디라도 나가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만날 이도, 해야 할 일도 없는데 거의 매일을 또 나가고 있다. 주어진 역할은 없는데 마음만 조급한 상태인 것이다.

 

어째 난 심심함과 공허함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퇴사 전에는 심심할 틈이 없었기에 ‘나는 다시 심심함을 찾고 싶어! 그것만 되찾아도 퇴사는 성공일 거야.’라고 P에게 말했지만, 막상 심심해지니 존재의 이유를 잃은 것만 같이 공허하기만 하다. 심심한 것을 즐길 수 있는 상태는 그 심심함의 끝이 전제될 때라는 걸, 퇴사하고 나서야 깨닫는다. (다행히 그럼에도 퇴사는 후회가 없다)

 

아무튼 심심한 백수에게 아트인사이트 문화초대는 존재의 쓸모를 일깨워주는 소중한 소식. 몸이 근질거리던 중 아주 반갑게 한스 짐머 영화음악 콘서트에 응했다.

 

 

한스짐머 영화음악 콘서트- 서울(1110) 포스터.jpg

 

 

위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한스 짐머 영화음악 콘서트는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진행됐다.

 

작년 겨울에도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위필하모닉의 히사이시 조 영화음악 콘서트를 관람했는데, 마냥 순수한 동화적 감상에 울컥해 눈물 콧물 다 뺏던 (진짜로 공연 내내 울었다) 기억이 있던 터라, 이번 한스 짐머 영화음악 콘서트 역시 크며 잊었던 것들을 되찾아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인셉션>, <캐리비안의 해적>, <탑건 : 매버릭> 등의 영화에 참여한 ‘영화음악 거장’ 한스 짐머의 음악들이야말로 90년대생과 함께 나이 든 음악이 아닌가.

 

 

 

인터스텔라, First step


 

콘서트 시작 5분 전, 아슬아슬하게 도착해, 좌석에 앉았다. 금세 공연장은 어두워졌고, 좀 전까지 머물렀던 소란스러운 밖과는 사뭇 다른 진지한 공기가 실감됐다.

 

첫 곡은 시작과 잘 어울리는 곡, 인터스텔라의 First Step. 우주를 소재로 다룬 영화인만큼 그 콘셉을 은유하는 푸른 빛의 조명이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의 머리 위로 내려오며, 콘서트도 조심스레 첫걸음을 밟는 듯했다.

 

First step은 혼란스럽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현악기의 현란한 선율을, 단조롭지만 웅장한 관악기가 묵직하게 잡아주어, 가보지 않은 깜깜한 우주에 대한 거대한 두려움과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게 하는 주인공들의 단단한 희망이 담긴 곡이었다.

 

난 인터스텔라를 본 적 없었음에도,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조명 등으로 그 영화의 장면들을 눈감고 뭉뚱그려 그려볼 수 있었다.

 

 

 

 

 

탑건, 메인 테마


 

단연 최고로 기억에 남는 탑건 메인 테마는 마치 롤러코스터를 탈 때와 같이 뱃속을 간지럽히는 곡이었다. 이 곡은 현악기가 음악 전반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심벌즈 등의 타악기로 상승에 대한 기대를 부풀리다가, 드디어 공중으로 이륙하는 듯 전자 기타가 훅 치고 들어오며 전개됐다.

 

여기서 전자 기타는 소위 ‘신의 한 수’에 가까웠다. 악기 특유의 자유롭고 청량한 소리가 비행이라는 탑건의 콘셉을 아주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던 것.

 

이 음악을 듣는 동안 중력에 얽매이지 않고 유연하게 상승하고 낙하할 수 있는 파일럿이 느낄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고, 난 이 메인 테마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집중해서 들은 이는 결코 탑건이란 영화를 기억에서 추방 도리가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캐리비안의 해적, 메들리


 

90년대생 중 캐리비안의 해적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는 그 시기를 풍미한 블록버스터 영화 중 하나다. 그만큼 영화음악도 유명할 수밖에.

 

오케스트라도 그것을 염두에 두었는지, 캐리비안의 해적 메들리를 공연 가장 마지막에 배치했다. 싸움이 잦고, 비밀이 많은 해적물 특성상 비장함과 긴급함이 해당 메들리에 담겼다. 현악기는 날카로운 소리로 위협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타악기와 관악기는 쉴 틈 없이 관객의 귀를 깨우는 식.

 

강약과 완급을 조절하며 능숙하게 관객을 밀고 당기는 캐리비안 해적 메들리를 끝으로, 콘서트는 유쾌하면서도 위엄있게 막을 내렸다.

 

 

 

 

가족과 함께 거실에서 뒹굴거리며 봤던 <이집트 왕자>, 사촌들과 우르르 몰려가 영화관에서 본 <마다가스카르>, 그 시기 나와 남동생의 해적 놀이의 원천이 되었던 <캐리비안의 해적>까지. 영화음악에는 한 시기의 발자취가 스며있다. 그래서인지 영화음악을 들으면 잊고 있던 것들을 잠시나마 되찾은 기분이 든다.

 

서른이 된 나는 그의 음악을 빌려 어린 시기에 최대한 접속하려 애썼고, 놀이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럽게 유희할 수 있던 천진함의 세계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건 분명 음악이 끝나고 난 후엔 쉽사리 머무를 수 없을 어떤 세계였다.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