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백은영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 매거진 조이 Vol.1: 집이 없어

글 입력 2024.11.1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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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에는 웹툰을 정말 많이 봤고 평생 그럴 줄 알았는데, 언젠가부터 챙겨보는 웹툰이 점점 줄어들더니 이제는 일주일에 두세 개 정도 간신히 본다. 그마저도 한 달에 한 번쯤 몰아서 보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내 핸드폰에서 웹툰 앱이 사라지지 않게 해준 작품은 와난 작가의 <집이 없어>. 그의 작품은 항상 재밌게 봤기 때문에 오랜만에 웹툰을 보기로 했을 때 고민 없이 선택한 것뿐인데, 생각보다 많이 빠져들어 완결까지 함께 달렸다.


오디오 웹툰부터 시작해 팝업스토어, 애니메이션 소식 등이 전해지며 팬들을 즐겁게 하더니 이번에는 <매거진 조이>의 창간호로 다시 만나는 기쁨까지 안겨주었다. 웹툰 잡지라는 건 처음 봐서 대체 어떤 것인지, 웹툰 단행본과는 어떤 차이점을 가졌는지 궁금했는데 직접 보니 그 두 가지를 비교할 생각을 했다는 게 민망할 정도로 전혀 다른 책이었다. <집이 없어>의 팬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롭게 읽을 이 매거진의 주요 구성은 작품 소개 및 등장인물 프로필, 작가 인터뷰, 독자 칼럼, 그 외 오락거리 정도가 될 텐데, 어쩌다 보니 독자 칼럼을 가장 먼저 읽게 되었다. 그것도 순서대로가 아니라 대뜸 세 번째 칼럼부터.

 

 

[다산북스]매거진조이_집이없어_표지(평면).jpg

 

그건 절대 내 탓이 아니며 오직 책의 앞부분에 나와 있는 칼럼 인용구 하나가 너무 인상적이었던 탓이다. ‘백은영을 사랑하기는 어렵다(p.9)’. 여러 인물 중에서도 두 번째 주인공 격인 ‘백은영’이 독자에게 주는 첫인상은 최악이다. 최악이라는 말도 부족하고 최최최최최악이 적절하겠다. <집이 없어>는 작은 판타지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학원물이고, 이처럼 일상적인 배경을 가진 작품에서 날강도짓을 하는 캐릭터를 좋아하기란 쉽지 않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날강도라, 주인공 ‘고해준’의 지갑을 훔치고 무려 칼부림까지 하며 현란한 등장을 한다. 그러니 백은영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아무래도.

 

 

 

백은영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그래서/그럼에도’


 

나는 주로 ‘어렵다’는 표현을 아쉬운 결과를 변명하기에 앞서 사용한다. 시험을 백 점 맞기는 어렵다. 그래서 나는 백 점을 맞지는 못하고 구십 점 정도 맞았다. 매일 운동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난 매일 운동하지는 못하고 주 3회 정도 한다. 어려움은 내 부족함에 타당한 이유를 만들어주고 내 현재 상태에 안주하게 돕는다. ‘백은영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나는 백은영을 사랑하지는 못하고 안쓰럽게 여기기는 한다.’ 칼럼니스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것일까? 백은영은 사랑하기 어려운 인물, 그래서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인물? 하지만 만화를 재밌게 본 사람이라면 이 주장에 공감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설령 백은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그걸 변명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러면 이번엔 ‘어렵다’의 반대 사례를 알아보자. 이것도 아주 흔한 용례다. 시험 백 점을 맞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나는 백 점을 맞았다. 매일 운동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난 매일 운동한다. 여기서 어려움은 자신의 재능 또는 노력을 돋보이게 하고 이 성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강조한다. ‘백은영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나는 백은영을 사랑한다.’ 이것이 칼럼니스트의 의도라고 봐야 할까? 하지만 백은영을 사랑하는 것은 대체 어떤 성공을 가져오는가? 백은영을 사랑하는 것은 밥을 먹여주지도 않고 정신이나 몸을 건강하게 하지도 않아 어떤 식으로도 이롭지 않다. 오히려 해로운 편일 터. 백은영을 향한 사랑은 자랑할 만한 성취가 아니다.


심지어는 내가 백은영을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조차 단언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백은영을 사랑하기는 어렵다’는 대체 무슨 뜻일까.

 

 

 

백은영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백은영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문장 하나만 붙들고 늘어지지 말고 이제 전체 칼럼을 좀 읽어 보자. 바로 뒤에 나오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고된 현실에서 눈을 돌릴 수 있는 재밌는 서사, 사이다 썰, 낭만적이고 따뜻한 이야기를 기대했던 독자라면 이 끈질기게 답답한 이야기를 쉽게 포기하리라(p.160)’. 그래서 사랑하지 못한다고도 하지 않고, 그럼에도 사랑한다고도 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최종장 속 사랑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과정의 어려움이기 때문이다.


어려움은 그것을 겪은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어려움은 그를 사랑하려는 과정을 겪은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작품 내에서 백은영을 사랑하려는 과정을 가장 치열하게 지나온 것은 고해준이다. 그런데 말도 안 되게도, 이 노력의 목적은 그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목적이 있다면 그 노력 자체, 어려움을 직면하는 것 자체다. 닥친 어려움을 끊어내고 외면하는 대신 도리어 달려든다. 해결했는지 못 했는지, 얼마나 걸렸는지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려움을 제대로 마주하기만 한다면.


고해준과 백은영의 사이는 여전히 기묘하다. 인물 소개에도 ‘때로는 원수, 때로는 동지 같은 친구’라고 되어 있다. 그들의 사이가 친구라는 이름표를 깔끔하고 단정하게 붙일 수 있는 관계가 되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의 긴 여정을 무의미한 ‘삽질’로 치부했다가는, 그들의 삽이 퍼낸 흙으로 단단한 지반이 준비되었음은 보지 못할 것이다.


<집이 없어>의 목적은 고해준의 트라우마 극복이 아니다. 백은영의 교화도 아니다. 목적은 없다. 대신 고해준의 집을 짓는 이야기고, 백은영의 집,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많은 아이들의 집을 짓는 이야기다. 집을 짓는 것이 목적이라기엔, 그 집의 최종 모양새에 아무도 관심이 없다. 그냥 계속 집을 짓는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지만 끝내 변한다. 이 작품에서 우리가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은, 그 끝을 함께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얻기 어렵기 때문에 선물 같은 서로의 손을 잡고 튼튼한 집을 짓는 그 순간을 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납작하게 눌려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2차원의 윷놀이판이 아니라, 복잡하고 정교한 과정이 그대로 담긴 한 채의 집 같은 3차원의 우리들을.

 

이 아이들에게는 가능성이 있다.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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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하기는 어렵다


 

‘백은영을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조차 단언하기 어렵다’. 사실 우리 삶에서 단언하기 어려운 상황이 이것 하나뿐일까. 그러나 우리는 의외로 쉽게 단언한다. ‘착한 사람’, 그리고 ‘나쁜 사람’. 나쁜 사람이 있으면 ‘참교육’을 하고 ‘사이다’ 썰을 만들며 ‘손절’한다. 세상에 단언하기 어려운 것이 너무 많다 토로하지만 사실 우리가 더 못하는 건은 단언하지 않기 같기도 하다.


하지만 단언은 어쩐지 끝을 정하는 것 같다. 끝없는 변화 가능성을 제동하는 것 같다. 함부로 단언하고 싶지 않다. 함부로 단언하지 않고 싶다. 모르는 채로 내버려두겠다는 뜻이 아니다. 계속해서 알아가려는 마음이다.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생각난다. 내가 단언하는 것은 내가 단언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뭐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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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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