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기변환]어느물리학자의낮잠_포스터.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411/20241110233212_hskmxuco.jpg)
물리학도를 꿈꾸는 차연과 기억을 잃은 노파의 이야기.
둘은 극이 진행되는 내내 서로 만나지 않고 다른 시공간 안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그려 나간다. 그러나 관람객은 알 수 있다. 이 둘이 무언가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말이다.
그 둘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것 같던 연극은 전개될수록 뒤섞이고 뒤틀리며, 관객은 이제껏 몰입해 왔던 스토리의 붕괴를 경험한다. 우리가 선택한 연극의 이야기는 그저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연극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은 평행세계와 다중우주, 양자역학의 개념을 빌려 관람객에게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한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우리가 '현실'이라고 느끼던 모든 상황들은 유일하게 존재하는 '사실'이 아닌 그저 넓게 펼쳐지고 얽혀있는 여러 세계관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모든 장면과 인물들은 더욱 뒤죽박죽 섞여간다. 마치 경계가 확실했던 차원이 깨져가듯이 말이다. 관람객은 누군가의 복잡하고 무질서한 꿈속을 들여다보는듯한 느낌이 든다. 시작은 현실이었지만, 끝은 꿈도 현실도 아니었으며 어느 것이 진실인지 현실인지 모를 전개 속에서 관람객은 억지로 붙잡고 가던 '상황'에 대한 현실적 이해를 이내 포기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극 중 주인공 차연은 대학원 선배에게 호감을 가지는데 그 둘은 서로의 관계를 놓고 진지한 말다툼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속한 우주, 즉 연극이 주로 다루던 세계관을 벗어나면 그들이 읊던 대사는 전혀 연관 없는 다른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무의미하게 오고 가며 그 말의 무게를 잃는다.
단 하나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몰입했을 때에는 너무나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무한한 가능성 중 그저 하나의 예시가 되어버린 순간 그 어떤 장면도 중요해지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말'이 우리에게 의미 있을 수 있는 이유가 '상황' 때문임을 깨닫게 한다. 말 자체에는 중요성이 없다. 특정 상황이 그때의 말을 그렇게 만들 뿐이다.
연극이 관람객에게 주고자 했던 메세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연극 공연과 물리학 이론의 만남을 시도한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은 우연의 반복과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우리의 유한한 삶을 되돌아볼 수 있도록 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우연과 불확실성'. 연극은 그 추상적인 개념을 관람객이 체감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나 그 과정이 관람객에게 친절했는지를 묻는다면 그 점은 조금 의문이다. 완결된 이야기를 처음부터 알고 있는 관람자라면, 등장인물의 행동과 극의 전개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에 대한 배경 지식 없이 연극을 관람했다면 다소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는 지점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은 물리학의 접목을 시도했다.
그 과정이 다소 난해했을지 몰라도, 누군가는 이해하지 못했을지라도 연극으로 물리학을 풀어내려 한 도전만큼은 굉장히 용감하고 신선했다고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