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내가, 여기에, 이렇게 있다는 것 – 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긴 해

글 입력 2024.11.07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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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담과 낙관


 

돌아보면 대학에서 콘텐츠 전공 졸업 후, 사부작사부작 콘텐츠 관련 일을 해왔다. 책, 영화, 공간, 일상 등 좋아하는 분야를 두루두루 찍먹하며 회사 안팎으로 꾸준히 콘텐츠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이렇다 내세울 수 있는 전문 분야나 자랑스럽게 내놓을만한 커리어 같은 건 아직도 없는 듯하다.

 

퇴사 후 두 달이 지나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이름 앞뒤에 붙은 수식어를 다 뗀 백수가 되어 마주한 내 능력은 매우 작고 귀여웠다는 것이다. 퇴사 전엔 시간만 생기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당장 내 능력으로 회사 밖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카페 알바나 전시 안내원 등 최저시급을 간신히 받는 일들이 대부분이었고, 난 스스로를 ‘보잘것없는 사람’이라 낙인찍고 낙담하기까지 이른다.

 

하여 퇴사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무기력하게 웅크리고 지냈다. 다양한 시도들이 별 의미 없게 느껴졌다. 앞으로 상황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게 잘 믿기지 않았다.

 

실체 없는 두려움과 스스로 만든 절망으로 행동에 제약이 걸리는 것을 느끼며 날 가로막는 빽빽한 수치심과 날카로운 좌절이 시간의 흐름에 자연스레 씻겨나가길 매일같이 바랐다. 내겐 미래에 대한 낙관을 이야기해 주는 말들이 필요했다. 근거가 빈약할지라도, 아무튼, 뭐든, 차근차근 하다보면 분명 지금보단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 같은 것.

 

내가 이 책을 고른 이유다. 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긴 한다잖아. 지금 이 시기에 들어볼 만한 이야기였다.

 

 


책 <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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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일본인 히키코모리 사이토 뎃초가 타국인 루마니아의 소설가로 데뷔한 과정을 담았다.

 

 

“나는 히키코모리다. 어려서부터 끝도 없이 내향적이고 생각이 과한 인간이었다.”

 

“타고나기를 은둔하는 체질. 어린 시절을 보낸 방구석에서 아저씨로 늙을 운명을 짊어진 존재. 호두 껍데기에 갇힌 사회 부적응자. 뭐, 그런 거라고 보면 된다.”

 

- 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긴 해 中

 

 

그의 이야기가 내게 흥미를 불러일으킨 건, ‘루마니아어’나 ‘소설가 데뷔’ 등이 아니라 그가 ‘방구석 히키코모리’라는 사실이었다. 현실감각 따위 개나 주고 사회와 단절한 채 자신의 세계에 갇혀 그 안에서만 맴도는 히키코모리적 성향이 내게도 있다는 걸 내심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스스로를 설명한 문장만으로 난 얼굴도 모르는 사이토 뎃초라는 이방인에게 친밀함을 느낀 것이다.

 

 

“이삼단 콤보를 겪자 내 안의 뭔가가 완전히 무너졌다.” 

 

내게 남은 것은 터무니없는 우울의 혼돈뿐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시간이 무한한 것 같다. 초등학생들은 씹던 껌을 입에서 꺼내 침 범벅인 그걸 손가락으로 쭉쭉 늘리며 놀곤 하지 않나. 그런 식으로 시간이 지저분하게 늘어난다.”

 

- 같은 책

 

 

그는 대학 입시, 사랑과 취업의 실패 등 연속적인 좌절을 계기로 히키코모리 생활을 하게 됐다. 인생의 좌절을 연타로 맞을 때는 누구나 더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필요하지 않나.

 

 

“영화를 볼 때만큼은 마음이 편했다. 내 상황과 전혀 다른 광경들이 눈에 들어오면 이런저런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중략) 이 현실 세계 자체를 향한 폭발적인 애수, 파괴적인 불안, 차분한 분노를 잊을 수 있었으니까”

 

“이 영화를 보고 루마니아어로 소설이나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 같은 책

 

 

그는 방구석 생활을 하던 중 아주 우연히 생의 좌절과 슬픔을 도피할 안식처를 하나 더 발견한다. 루마니아어다. 남아도는 시간을 어찌할 줄 몰라 그나마 수동적으로 시간을 까먹을 수 있는 활동인 ‘영화 보기’를 택한 것이 루마니아 영화에 대한 관심으로, 더 나아가 그 나라 언어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확장된 것.

 

 

“루마니아용 계정을 만들었다. 페이스북 한 계정당 5000명까지 등록할 수 있는 친구를 모두 루마니아인으로 채우려는 기개쯤은 있어야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고 확신했다.”

 

- 같은 책

 

 

집 밖으로도 잘 나가지 않는 (고로 루마니아 유학 같은 건 갔을 리가 없는) 히키코모리 사이토는 ‘학습할 교재도 변변치 않은’ 생소한 언어, 루마니아어를 향한 지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세상과 연결된다. SNS로 루마니아인 3천 명에게 친구 신청을 걸어 자발적으로 친구와 스승을 스스로 만들고 그들에게 루마니아 문화와 루마니아어를 배운다.

 

 

“전 세계에서 보면 루마니아어는 하염없이 자그마해서 아무도 그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 같은 책

 

 

어쩌면 사회에서 배제되었다는, 뒤처졌다는 감각으로 내가 글쓴이에게 친밀감을 느낀 것처럼, 그도 연약한 입지에 놓인 루마니아어에 친밀감을 느낀 게 아닐까. 비주류는 오랜 시간 보내지 않고도 비주류를 알아볼 수가 있다.

 

 

“노이로제와 은둔을 거치며 나를 둘러싼 일본이라는 사회에 깊은 절망과 허무함을 느꼈다. 그러니 쓰고 싶은 주제도 바로 거기에서부터 농밀하게 피어났다. 이 세상에는 빌어먹을 상황이 만연하다.”

 

“이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걸 루마니아어로 번역해 보자고.”

 

- 같은 책

 

 

대학에서 일본 문학을 전공한 그는 은둔하며 자국어로 써왔던 소설을 루마니아어로 번역해 SNS로 구축한 관계 중 하나인 루마니아인 친구이자 스승, 랄루카에게 보여준다. 그녀는 그 소설을 루마니아 문예지에 보내고, ‘일본의 어두운 부분’을 다룬 글쓴이의 단편은 루마니아에서 제법 화제를 일으킨다.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계속 별 볼 일 없이 살고 있었잖아요.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일본이 아니라 다른 나라가 나를 이해해 주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가장 좋은 형태로 열매를 맺었다고 하면 좋을까요, 내게는 제2의 고향인 루마니아가 먼저 나를 인정해 준 것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 같은 책

 

 

그는 그렇게 일본인 최초로 루마니아어 작가가 된다. 그러나 기쁨을 제대로 누릴 틈도 없이 난치병(크론병) 진단을 받는다. 꿈을 이루자마자 찾아온 갑작스런 절망에 주저앉을 법도 한지만 사이토는 되려 그것을 가볍게 다루길 택한다.

 

 

“인생에 적응하는 나의 비밀은? 셔츠처럼 절망을 교체하는 것.”

 

- 같은 책

 

 

비로소 스스로를 작가라고 소개할 수 있게 된 그의 일상은 자신을 설명할 단어가 히키코모리뿐이었던 이전과 다를 바가 없다. 그는 방에서 나가지 않는 히키코모리인 자신과, 그래서 자존심은 센 한편 자기 긍정감은 낮은 자신과, 난데없이 크론병에 걸린 자신과 살아간다.

 

 

 

내가, 여기에, 이렇게 있다는 것


 

고립되어 자기 세계에서 주로 부유하는 이들에게 풍기는 비참함과 자기연민 등 자폐적인 사고 특유의 퀘퀘함이, 자칭 히키코모리인 그의 말에선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그 이유는 ‘잠깐 고민하긴 해도 집착하지 않는’, 그러니까 ‘바람이 통하는’ 그의 마음가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몸을 고려하면 루마니아 이민은 앞으로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나라도 루마니아로 이민, 루마니아 문학으로 이민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육체는 무리여도 영혼은 그곳에 갈 수 있다."

 

- 같은 책

 

 

그는 절망을 짊어진다. 자꾸 육체와 정신을 끌어내리는 절망의 중력을 과장하거나 축소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들쳐 업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세계를 자유로이 활보한다.

 

 

“나는 바로 당신에게 다른 곳에는 없는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 그저 지금 서 있는 그 자리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곳이기에 해낼 수 있는 것이 있다.”

 

- 같은 책

 

 

사랑, 취업, 건강 등 이래저래 내 맘대로 안 되는 일들을 매 순간 하나하나 완벽히 해결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인 듯하다. 애초부터 삶에 무작위로 들이닥치는 크고 작은 낙담을 피하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절망의 무게를 견디며 뒤뚱뒤뚱, 이래저래, 아무튼, 살아가는 방법이 아닌가.

 

 

“좋든 나쁘든 지금 네가 거기 그렇게 있는 게 최대의 강점”

 

- 같은 책

 

 

그의 말대로, 내가, 여기에, 이렇게 있다는, 그 세 가지 조건만으로 할 수 있는 건 분명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여기에, 이렇게 있다는 사실이 비로소 고유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는 최적의 조건으로 작용할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거절과 좌절과 낙담을 적으로 여긴다면 아마 우리는 그 무게에 짓눌려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퇴사 후 내가 그랬듯. 이 책으로 생의 절망을 내 편으로 만드는 태도를 상기한 기분이다.


 

[권기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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